[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스페인의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명인 야고보(스페인식 이름은 산티아고)의 무덤이 있는 이곳 대성당을 향해 사람들은 걷고 또 걷는다.
대성당에 이르는 길은 여럿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은 프랑스에서 출발하는 ‘카미노 프란세스(Camino Frances)’ 루트다. ‘프랑스 사람들의 길’이라는 뜻을 가진 이 순례길은 무려 800km나 된다.
한 달이나 걸어야 하는 이 길을 어떤 이들은 순례를 위해, 어떤 이들은 여행을 목적으로, 어떤 이들은 ‘나’를 찾기 위해 걷는다. 이 길을 찾는 이들이 한 해 수십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내포에도 산티아고 길 같은 순례길을 만들 수는 없을까. 내포에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인 솔뫼성지, 해미국제성지 등 천주교 성지와 사적지가 20여 곳이 된다.
경관이 수려한 곳도 곳곳이다. 이를 잘 연결한다면,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신앙을 돈독히 다질 수 있는 여정으로,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도보여행길이 되어준다면,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도 가능하지 않을까. 요즘 트렌드인 트레킹과도 맞춤하다.
일찍이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꿈꾼 도시가 있다. 당진시는 버그내 순례길을 조성하고 대한민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와 업무협약을 체결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버그내’란 합덕읍내를 거쳐 삽교천으로 흘러드는 물길 이름이면서, 조선말 천주교 신자들이 비밀리에 만나던 합덕장터의 옛 지명이다. 버그내 순례길의 출발지는 김대건 신부의 생가 터인 솔뫼성지다. 조선 제5대 교구장인 다블뤼 주교 유적지가 있는 신리성지까지 13.3km, 약 4시간 정도 걷는 길이다.
솔뫼성지를 나선 길은 신자들이 남의 눈을 피해 만나 안부를 묻고 정보를 나누며 신심을 다지던 합덕읍내 버그내장터로 이어지고 합덕삼거리를 지나면 합덕방죽 옆 언덕에 서 있는 합덕성당을 만난다. 붉은 벽돌을 쌓아올려 지은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이다.
합덕방죽(합덕제)은 김제 벽골제, 황해도 연안 남대지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방죽으로 꼽히며 삽교천 하류 농경지에 물을 대던 저수지였다.
버그내 순례길을 걸으려면 물고기 그림 안에 ‘버그내 순례길’을 뜻하는 ‘ㅂㄱㄴㅅㄹㄱ’을 써넣은 팻말을 따라가면 된다. 팻말을 따라 한동안 마을길 산길을 지나면 성동리의 ‘원시장(1792년 순교) 원시보(1799년 순교) 우물’을 거쳐 무명 순교자의 묘에 이른다.
1972년 목이 없는 시신 32구가 묵주와 십자가들과 함께 발굴됐는데, 이를 여섯 봉분에 합장해놓았다. 그 위쪽에는 옆 공동묘역에서 옮겨온 손자선 순교자 가족 묘 14기도 모아 놓았다.
신리는 천주교 박해기에 가장 규모가 큰 천주교 교우촌으로, 조선의 카타콤바(로마시대의 비밀교회)로 불린다.
손자선의 생가, 이곳에 머물며 천주교 서적을 저술하고 한글로 번역하던 다블뤼 주교의 유허지인 작은 초가가 있다. 신리성지는 천주교 박해기를 그린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순교자기록화관이 있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원이 조성돼있다.
보령시는 갈매못-서짓골 성지 순례길 9.5Km를 만들었다. 순교한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요셉) 회장의 유해가 신자들에 의해 오천면 갈매못부터 미산면 서짓골 성지로 옮겨진 길이다.
서산시도 해미면 대곡리 한티고개와 해미순교성지를 잇는 11.3㎞ 구간에 천주교 순례길을 조성해놓았다. 내포지역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해미읍성과 해미순교성지(여숫골)로 압송됐던 경로다.
아쉬운 점은 이들 순례길이 시 경계에 막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계를 열어 서로 잇고, 특히 솔뫼성지에서 해미국제성지를 연결하는 순례길을 만들었으면 한다. 산티아고 길의 ‘알베르게’처럼 저렴한 가격으로 먹고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어야 하겠다.
비록 신자가 아니더라도, 신분차별 없는 공평한 세상을 희구하다 고통 받고 사라져간 선인들의 자취를 더듬는 여정이면서, 험난한 세상 견디느라 다치고 여윈 몸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는 길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