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추사 김정희, 그 이름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다. 조선을 대표하는 명필, 그가 쓴 글씨를 추사체라고 한다는 것도 다들 안다.
흔히 쉽게 추사체라고 하지만 추사체의 실체를 보면 매우 다양하여 과연 어떤 글씨를 추사체라고 하는지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아주 어렵다.
추사의 글씨를 대하면 먼저 당혹스럽다. 그의 글씨에서 느껴지는 당혹감은 한문을 잘 모르는 데서 오는 것만이 아니다. 추사와 같은 시대의 인물인 유최진도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
“추사의 예서(隸書)나 해서(楷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妙)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감히 비유해서 말하자면 불가(佛家) 도가(道家)에서 세속을 바로잡고자 훌쩍 세속을 벗어남과 같다고나 할까.“(유최진 ‘초산집적’)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추사의 예술을 다룬 책 ‘완당평전’에서 추사체를 이렇게 설명했다.
“추사는 정통적인 순미(純味) 우미(優美)가 아니라 반대로 추(醜), 미학용어로 말해서 미적 범주로서의 추미(醜美)를 추구했다. 즉 파격의 아름다움, 개성으로서의 괴(怪)를 나타낸 것이 추사체의 본질이자 매력인 것이다.”
추사는 어떻게 그의 예술적 개성, 추사체의 묘를 터득한 것일까. 추사와 같은 시대에서 활동한 박규수는 추사체의 형성과정을 들려준다.
“완옹(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 중국 명나라의 서예가)에 뜻을 두었고 중세(스물네 살에 북경에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와 미불을 따르고 더욱 굳세고 신선해지더니…드디어는 구양순(歐陽詢,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의 신수를 얻게 되었다.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없게 되었고…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듯하여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박규수 전집 ‘유요선이 소장한 추사유묵에 부쳐)
고전을 배우고 탐구하고 쓰고 또 쓴 노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추사는 ‘팔뚝 아래 309비를 갖추다’라고 했다. 한나라 때의 예서(隸書)를 집대성한 ‘한예자원’에 수록된 309개의 비문 글씨를 쓰고 또 쓰고 해서 언제든 쓸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얻은 그의 예서는 중국 지식인들도 해동 대가라며 엄지를 세웠던 것이다.
추사는 그런 꾸준한 노력과 참을성으로 고전중의 고전을 섭렵하며 글씨를 익혔다. 훗날 추사는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1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그의 글씨는 국내뿐 아니라 청나라 학예인들의 상찬을 받으며 가히 국제적으로 높은 명성을 얻었다. 청나라 연경에서는 추사의 글씨를 갖고자 하는 문인 학자들이 줄을 이었고 일본 사람들도 그의 글씨를 구하려고 분주히 움직였다.
우리나라 학자와 예술가로 세계무대에서 이처럼 높은 성과와 인기를 얻어낸 이가 추사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세계 속에서 우리를 당당히 펼칠 수 있는 민족적 기상과 자부심을 펼치려 한다면 모름지기 추사와 같은 노력과 의지와 능력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추사를 통해 절절히 배우는 것이다.
학문과 예술로 조선 지식인 사회에 일약 바람을 일으키고 또한 그것으로 동북아를 한류로 쓸어버렸던 사람.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 추사가 바로 내포, 예산 사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