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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 10년 내포문화 돌아보기] 30. 제주 유배때 그린 '세한도'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 '우뚝'

추사 김정희 ②마음을 그린 ‘세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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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2.12.13 10:26
  • 기자명 By. 안순택 기자
▲ 세한도,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정점으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
▲ 세한도,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정점으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추사 김정희 선생이 일곱 살 때 입춘첩을 써서 대문에 붙였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채제공(蔡濟恭)이 이를 보고 들어와 누가 쓴 것인지 물었다. 체제공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서 이름을 한 세상에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

‘대동기문’에 전하는 이야기인데, 아마 추사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해 훗날 지어진 일화로 보인다. 더욱이 채제공과 추사 집안은 남인과 노론 사이로 말도 섞지 않는 관계였다. 정적마저 인정한 뛰어난 글씨라는 뜻일 것이다.

어쨌든 이 말은 사실이 됐다. 추사는 뛰어난 시인이었으며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대 문장가였다. 또한 진흥왕순수비를 찾아내고 고증한 금석학자이기도 했다. 금석학과 고증학에 있어서 일본인 동양철학자 후지츠카 지카시가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것이다.

▲ 추사의 '해천일립상'. 추사의 애제자이자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제주에 유배 중인 추사를 그린 그림이다. 소동파의 입극도를 추사로 바꿔 그렸다.
▲ 추사의 '해천일립상'. 추사의 애제자이자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제주에 유배 중인 추사를 그린 그림이다. 소동파의 입극도를 추사로 바꿔 그렸다.

문학 사학 철학 그리고 시 서 화까지 모든 방면에서 추사는 최고봉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그가 가장 잘한 것은 글씨다 하고 말하면 아니다, 글씨에 가려 시가 뛰어남을 모르고 있다고 하고, 누구는 아니다, 추사는 시와 글씨 같은 예술이 아니라 금석학 고증학에 더 뛰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추사의 그 많은 출중한 성취들이 추사체라는 글씨에 가려져 버렸으니 아쉽기만 하다.

추사의 예술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표현이 ‘학예일치(學藝一致)’다. 추사에게는 그림과 글씨도 학문이었다. 추사는 그림도 학문을 닦듯이 당대 최고의 명작들을 모사하면서 배우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수많은 명작들을 보고 탐구했다. 그런 노력으로 그는 그림이 곧 시가 되는 문인화의 정수를 꿰뚫어 버렸다.

▲ 세한도 그림부분
▲ 세한도 그림부분

그림은 사물의 형상을 똑같이 그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감정과 사상을 드러내고 나아가 학식과 인품이 담겨야 하는 그림이 문인화다.

그런 추사의 예술혼이 살아 숨 쉬는 그림이 ‘세한도(歲寒圖)’다.

1844년 추사 나이 59세 때 제주도에 유배온 지 벌써 5년이 되었을 때 추사는 그의 예술의 최고 명작으로 꼽히는 ‘세한도’를 그렸다.

가지를 늘어뜨린 소나무 한 그루 그리고 붓을 문질러 대충 그린 것 같은 나무 3그루, 그 사이에 길쭉한 집 한 채가 그려진 이 그림은 그다지 잘 그린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 그림은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실제 경치를 그린 것이라면 그림은 0점짜리다. ‘세한도’는 추사의 마음을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 있는 격조와 문기(文氣)가 생명이다.

오랜 풍상을 겪으면서 몸통은 썩고 가지 끝에 솔잎 몇 개가 남아있는 노송의 몰골은 유배 생활에 지친 추사의 모습 같다. 찬바람이 부는 듯하고 스산하기 짝이 없는 그림의 분위기는 추사의 마음일 것이다.

▲ 세한도 글씨부분
▲ 세한도 글씨부분

그림 옆에 발문이 쓰여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 했는데…”라면서 귀한 책을 구해준 이상적에게 감사의 뜻을 적고 있다.

발문의 글씨는 예서의 느낌이 있는 해서체로 글씨는 반듯하고 엄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서 심금을 울리는 강도가 아주 진하다. 그림과 글씨가 조화롭게 어울리면서 고고한 문기를 한껏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세한도’는 추사 연구가인 일본인 후치츠카에게 넘어가 오랫동안 그의 소유로 있었다. 나라의 보물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걱정한 손재형 선생은 도쿄로 후치츠카를 찾아가 넘겨달라고 졸랐다. 두 달간 매일 문안인사를 하며 마침내 ‘세한도’를 들고 서울로 돌아왔으니 그의 열성도 기억해 둘 만하다.

손재형 선생이 ‘세한도’를 들고 귀국하고 나서 석 달 뒤 후치츠카의 서재가 폭격을 맞아 그가 갖고 있던 책과 서화가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으니 참으로 아슬아슬했던 생환이었던 것이다. ‘세한도’는 국보 180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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