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추사 김정희, 그 이름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다. 조선을 대표하는 명필, 그가 쓴 글씨를 추사체라고 한다는 것도 다들 안다.흔히 쉽게 추사체라고 하지만 추사체의 실체를 보면 매우 다양하여 과연 어떤 글씨를 추사체라고 하는지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아주 어렵다.추사의 글씨를 대하면 먼저 당혹스럽다. 그의 글씨에서 느껴지는 당혹감은 한문을 잘 모르는 데서 오는 것만이 아니다. 추사와 같은 시대의 인물인 유최진도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추사의 예서(隸書)나 해서(楷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괴기한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추사 김정희 선생이 일곱 살 때 입춘첩을 써서 대문에 붙였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채제공(蔡濟恭)이 이를 보고 들어와 누가 쓴 것인지 물었다. 체제공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서 이름을 한 세상에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대동기문’에 전하는 이야기인데, 아마 추사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해 훗날 지어진 일화로 보인다. 더욱이 채제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날아갈 듯한 기와집이 손님을 맞는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ㄱ자 남향집인 사랑채다. 안마당 화단 한가운데 네모난 돌기둥이 서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金正喜. 1786~1856)이 만들어 세워놓았다는 해시계다.사랑채를 지나 ㅁ자 집인 안채로 이어지는 이곳은 ‘추사고택’이다. 추사의 옛집이니 추사 김정희 선생이 나고 자란 곳이다.추사의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결혼했다. 영조는 김한신을 사위로 맞으면서 그를 ‘월성위’에 봉했고, 서울 통의동 백송나무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스페인의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명인 야고보(스페인식 이름은 산티아고)의 무덤이 있는 이곳 대성당을 향해 사람들은 걷고 또 걷는다.대성당에 이르는 길은 여럿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은 프랑스에서 출발하는 ‘카미노 프란세스(Camino Frances)’ 루트다. ‘프랑스 사람들의 길’이라는 뜻을 가진 이 순례길은 무려 800km나 된다.한 달이나 걸어야 하는 이 길을 어떤 이들은 순례를 위해, 어떤 이들은 여행을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와 조산리가 만나는 해미천변은 과거에 ‘여숫골’로 불렸다.천주교 박해가 절정이던 시기 이곳에 끌려온 신자들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했다. “예수, 마리아”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 소리를 ‘여수마리’‘여수머리’로 알아들었고, 이곳을 ‘여수머리’로 부르다가 시일이 지나면서‘여숫골’로 불렀다고 한다.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간절하게 찾았던 곳 ‘여숫골’은 신자들을 산채로 묻어버렸던 생매장터였다.참혹한 생매장의 현장 ‘여숫골’은 지금 순교성지가 돼있다. 해미순교성지 입구에는 생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내포가 한국 천주교회의 못자리라면 이곳에서 싹이 튼 모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모는 김대건 신부일 것이다.한국의 첫 사제라는 의미에 더해 세계 교회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이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는 김대건의 사제 서품과 귀국으로 비로소 명실상부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김대건은 1821년 아버지 김제준과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김대건이 태어난 곳이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지금의 솔뫼성지다. 어렸을 적 이름은 재복(再福)이었다. 재복은 경기도 용인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한국의 첫 사제 성 김대건 신부의 조각상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세워진다고 한다.언론이 전한 소식에 따르면 성 김대건 조각상이 들어설 벽감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창설자 프란치스코 성인과 베네딕토 수도회 창설자 베네딕토 성인 등 수도회 창설자들의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수도회 창설자가 아닌 사제 성인으로는 김대건 신부 상이 처음이라고 한다. 가톨릭 주요 성인들과 같은 반열로 배치되는 것이다.성 김대건 신부의 조각상은 한진섭 조각가가 35t 규모의 카라라 대리석으로 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한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정민 한양대 교수가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숨은 이야기를 발굴해 쓴 책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에는 내포교회와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여럿 나온다.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내포교회를 세우고 이끈 사람들이 양반이 아니라 풀뿌리 민초라는 것이다.‘서학’은 천주교를 말한다.“초기 교회의 양상에서 지역별로 성격 차이가 발견되는 것은 흥미롭다. 여주나 양평, 충주 및 청주 교회는 양반 계층이 전면에 섰고, 충청도 내포 일대만은 유난히 신분 낮은 일반 백성과 노비 계층이 신자의 주축을 이루었다.내포 지역의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홍주순교성지는 순례길을 따라 걷게 되어있다. 홍주목사가 집무하던 동헌을 출발해 감옥터-진영-저잣거리-참수터-생매장터 순서로 돌아보게 된다.홍성군청에서 홍주역사박물관-조양문-북문교를 지나 월계천으로 이어지는 길인데 걷다 보면 문득 홍주성 전체가 순교현장임을 깨닫게 된다.교회 순교록에 따르면 홍성의 초기 박해(1791~1801년) 순교자는 8명이다.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등 4명은 시복시성이 추진되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여사울이란 이름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같다’ ‘비슷하다’ 는 의미의 한자 여(如)를 써서 “부유한 기와집이 즐비하여 마치 서울 느낌이 든다”(如서울)에서 유래됐다고 했다.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한자 지명이 호동리(狐洞里)인 것을 보면 여사울은 여우골이란 뜻이 아닐까 싶다. ‘여수골’ 또는 ‘여수울’로 불린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강세정은 ‘송담유록’에서 한 발 더 나간다. 그는 ‘여소동(余蘇洞)’ 또는 ‘야소동(邪蘇洞)’으로 썼다. ‘야소(邪蘇)’ 또는 ‘야소(耶蘇)’는 예수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작고 아담하다.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스페인풍의 기와를 얹은 여사울 성지의 성당은 예뻤다. 성당 맞은편에 야외 미사를 올릴 수 있는 풀밭과 제단이 있고, 제단 오른편 성모 마리아 상 옆으로 산책길이 나있다.산책길에는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의 모습이 돌에 새겨져 있다. 박해의 시대를 오롯이 신앙으로 견뎌낸 초기 교회 신도들의 고단했던 삶을 되새겨보라는 뜻은 아닐지.제단 왼쪽에 큼지막한 자연돌이 서 있고 그 돌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내포천주교복음첫터.1866년 병인박해 이전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보령시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섬. 짙은 해무를 지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신비로운 섬, 외연도는 음력 2월 보름이면 풍어당제를 올린다.풍어당제는 전횡 장군 사당에 위패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당제로 시작하는데, 당제를 지내는 동안 당주는 일절 말을 해서는 안 되고 위패에 한복 3벌을 걸치며 ‘지태’라고 불리는 소를 제물로 올리는 점이 독특하다.당제의 주신 격인 전횡 장군은 2천 년 전 중국의 실존인물이다. 한나라 유방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제나라 재상을 거쳐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왜? 제주해녀는 호도로 시집왔을까.대천항에서 뱃길로 50분, 섬의 생김새가 여우를 닮았다는 호도는 제주바다에서나 들을 법한 해녀의 숨비소리를 들을 수 있다.이 여우섬에 제주해녀들이 온 것은 1960년대 중반이다. 호도의 최쌍신 선장은 1960년대 제주해녀들을 모집해 호도에서 물질을 하게 했다. 이 해녀 가운데 호도 남자와 결혼해 정착한 해녀는 29명인데 처음으로 결혼에 골인한 해녀가 최 선장의 아내인 현여생 씨다. 호도에 많은 제주해녀들이 정착하게 된 데는 아마 현 할머니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
[충청신문=대전] 안숙택 기자 = 내포의 북쪽 관문이 당진이라면 남쪽 관문은 서천이다, 서천의 마량포구에는 ‘한국최초성경전래지’라고 큼지막한 돌에 새긴 기념비가 서있다.그 옆에는 조선의 판옥선과 영국함선이 나란히 서있다. 아마 200년 전 마량진 앞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재현해 놓은 것일 것이다.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날은 1816년 9월 5일이었다.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16년 7월 19일 자, 충청수사 이재홍이 올린 장계를 보자.“마량진 갈곶(葛串)에 이양선(異樣船) 두 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진의 첨사 조대복과 비인 현감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 고대도. ‘고대’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섬이다.마한 때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았다고 하고 그 먼 옛 사람이 살던 집터가 많다고 해서 ‘고대도’, ‘고담’이라고 불렸다.고대도는 최근 충남도가 야심차게 내놓은 ‘원산도 오섬 아일랜즈(Awesome Islands)’에 포함됐다. 치유 아일랜드로 개발된다, 물속이 환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깨끗한 청정해역과 잘 어울린다 싶다.충남에서 원산도 삽시도 장고도 다음으로 큰 섬이지만 마을은 하나뿐이다. 작은 마을에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 내포 해안은 해안선 847㎞에 유인도 35곳, 무인도 212곳 등 섬이 247곳에 달한다. 그 길이만큼, 섬의 수만큼 세계로 열려있는 셈이다.그러니 열린 세계에서 내포를 찾아오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1832년 보령시 고대도를 찾아온 외국인들이 있었다.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뱃길로 1시간, 고대도에 닿는다. 선착장에서 내려 마을로 가는 길 오른쪽을 마을입구, 왼쪽은 해안길이다.갈림길에 섬 둘레길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있다. 둘레길 1코스는 선착장을 출발해 고대도선교센터-칼 귀츨라프 해양역사전시관-고대도교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내포는 세계로, 세계는 내포로’라고 말하려면 빠뜨려서는 안 되는 곳. 고대 한반도에 세계로 열린 포털 같은 곳. 당진이다.당진이라는 이름은 먼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반도와 중국 대륙 사이의 서해 뱃길이 열릴 때 산둥성과 내포 지역은 가장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입지가 좋은 이 해안에 나루터가 생겼을 것인데, 백제 때 벌수지현(伐首只縣) 또는 뱃재(船峴)였다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당진현(唐津縣)으로 바뀐다.‘당나라로 가는 배가 뜨는 나루’라고 해서 당진이라고 했다지만 이 지역에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태안군 근흥면 신진도리. 섬의 생김새가 말이 달리는 모양이라고 해서 말섬, 마섬으로 불렸던 마도는 섬이되 이미 섬이 아니다.다리로 이어져 군내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섬 둘레가 300m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섬이지만 해안절벽이 눈길을 잡고 해넘이가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섬이다.해안절벽은 ‘오징어게임’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백패커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갯바위와 방파제에는 낚시꾼들이 어깨가 닿을 듯이 나란히 서있다.평온한 섬 풍경과 달리 마도 앞바다, 특히 옛날 마도 앞바다는 아주 거칠었던 모양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문어 같기도 하고, 낙지 같기도 하고. 생김새도 그렇지만 주꾸미는 이름도 재미있다.조선시대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한자어로 ‘준어’ 우리말로 ‘죽금어’라 한다 했다. 한자어 ‘준’자가 ‘쭈그릴 준’인데 바위틈에 쭈그리고 있는 모양을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어부들은 ‘쭈그리고 미끌거려’ 주꾸미라는데. 서유구의 ‘전어지’의 소개는 상세하다. “…초봄에 잡아 삶으면 머릿속에 흰 알이 가득 차 있는데 마치 찐 밥 같아 일본사람들이 반초라고 한다” 했다.내포 앞바다는 낚시 천국이다. 배를 타고 나가는 선상낚
경허의 세 제자를 말할 때 ‘수월이 있는 곳에 두타(頭陀) 수행이 있고, 혜월이 있는 곳에 사전(寺田) 개간이 있고, 만공이 있는 곳에 중창불사가 있다’고 했다.만공은 수덕사 정혜사를 크게 중창하였고, 서울에 ‘선학원(禪學院)’을 설립하는 데도 앞장섰다. 말년엔 서산 앞바다 간월암(看月庵)을 옛 절터에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간월도라는 섬의 이름은 문자 그대로 ‘달을 보는 섬’이라는 뜻이다. 고려 말의 왕사(王師) 무학 대사가 이 섬의 암자에서 달을 보고 도를 깨우쳤다고 해서 섬의 이름도 백제 때부터의 이름인 피안도를 버리고 간월도가
경허의 맏제자 수월이 겸손하고 자비로운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한다면 둘째 혜월은 ‘천진불(天眞佛)’이다. 강원의 강사스님들 앞에 죽비를 던져놓고는 이게 무슨 글자냐고 묻고는 강사들이 대답을 못하자, “땅이면 흙토(土)이고 그 위에 한 일(一)자를 얹으면 임금 왕(王)자 아닌가. 임금 왕자도 모르는 주제에 잘난 체들 하지 말게.”하고 깔깔거리는 천진한 어린아이 같았다.경허가 내포의 사찰을 돌며 선(禪)바람을 일으키고 있을 때 스물을 갓 넘긴 청년 스님이 경허를 찾아왔다. 청년 스님은 덕숭산 정혜사에서 경허의 설법을 듣고 가슴에 벼락이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천장사 인법당 공양간 옆에 ‘원성문(圓成門)’이라는 편액이 걸린 방이 있다.(원구문(圓求門)으로 읽기도 한다) 경허가 1년 동안 보임을 했던 방이다. 그 옆방이 ‘월면당(月面堂)’이다.월면은 만공의 법명이니 경허를 시봉하던 제자들이 머물렀던 방이다. 두 방 모두 한 사람 눕기에 벅찰 정도로 좁다. 이 작은 방에서 선기 하나만은 번뜩였을 터다.경허의 법을 이은 수법제자는 흔히 ‘세 달(月)과 말없는 학(鶴)’으로 불린다. 세 달은 수월(水月) 혜월(慧月) 만공(滿空)이며, 이 세 제자는 모두 천장사에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천장사는 단출하다. 탑 하나 석등 둘, 인법당, 산신각, 공양간, 요사채, 작은 선원, 지장전이 전부다.20년 전 왔을 때는 ‘ㄷ`자 모양으로 머리를 맞댄 절집이 전부였다. 불안해 보이는 탑이 하나 있으니 절 같기도 하고, 절이라기보다는 한 100년쯤 된 집 같기도 했다. 이름도 ’천장암‘이었다.깨달음을 얻은 경허가 천장암을 찾은 이유는 형 태허가 주지로 있고 어머니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꼭꼭 숨어 공부밖에 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 보임처(保任處)로도 맞춤이었을 것이다.보임(保任)은 찾은 본성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어린 만공은 계룡산 동학사에서 스승 경허를 만났다. 큰 스님이 될 그릇임을 알아본 눈 밝은 스승은 만공을 천장사로 데리고 간다. 천장사에서 만공은 주지 태허를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삼아 사미계를 받는다.천장사는 서산 연암산 중턱에 있다. 아라메 솔바람길 2-1 구간인 길은 오르막 경사가 급하다. 천장사는 백제 무왕 33년(서기 633년) 담화 선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경허는 친구 자암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장사를 이렇게 썼다.“천장사가 좋은 것은 한 쪽은 첩첩 산이요, 한쪽은 바다가 보이기 때문이다
[충청신문=대전] 안순택 기자 = 1080계단이 멈추는 정혜사는 선원이 돼있다.만공의 사형 혜월이 40년을 머물러 혜월의 체취가 짙다. 정혜사 아래 금선대는 만공이 처음 띠집을 짓고 덕숭산 생활을 시작한 곳이다.만공은 금선대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문이 나자 김좌진(金佐鎭)이라는 홍성 청년이 쳐들어왔다. 둘은 팔씨름으로 힘자랑 한판 대결을 벌인다.만공은 지고 이기는데 마음이 없다는 듯이 그저 팔을 세워들고 있었지만 김좌진은 있는 힘을 다해 만공의 팔을 넘어뜨리려고 용을 썼다고 한다.훗날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과 훗날 법륜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