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신문=대전] 윤지현 기자 = "우리들 모두가 떨어진다. 이 손이 떨어진다. 보라, 다른 것들을. 모두가 떨어진다."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현대미술의 거장 '안젤름키퍼'의 국내 첫 미술관 개인전은 온통 가을이다.
대전 동구 인동 '헤레디움'에서 열리는 '가을 Herbst' 전시가 오는 31일 막을 내린다.
푸릇했던 잎새들이 울긋불긋 단풍이 되고 결국 '떨어지는(fall)' 계절.
가을을 담은 이 전시를 향유하다 보면 인생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 왜 헤레디움에서 신표현주의 거장'안젤름키퍼'의 전시가 열렸나요?
안젤름키퍼는 2차 세계 대전 전후, 영국군이 본가를 폭격하던 날 병원에서 태어났다. "만약 내가 그날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죽었을 것"이라는 그는 유년 시절을 폐허에서 보냈다.
키퍼는 "폐허는 새로운 시작이고 창조가 이뤄지는 공간"이라며 폐허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을 품은 공간으로 해석했다.
슬픈 과거를 마주하고 희망찬 미래를 그리는 '재탄생'의 공간으로 조명한 것.
전후 세계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손꼽히는 키퍼가 '헤레디움'을 국내 첫 미술관 전시로 선택한 이유다.
일제강점기 당시 경제 수탈을 위해 존재한 동양척식회사이던 '헤레디움'도 이전 방치돼 오며 폐허의 위기를 겪었다.
지난해 '수탈의 공간'에서 '소통의 공간'인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는데, 건물의 역사와 키퍼의 이야기가 평행선을 달린다.
▷ 만들어지는 중일까요, 부서지는 중일까요?
'헤레디움'과 가장 정체성이 맞닿아 있는 설치미술작은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이다.
이 작품은 모로코에서 공수해 온 흙으로 만들어졌다.
118개의 벽돌로 쌓아 올린 작품을 보다 보면, 부서져 가는' 폐허'인지 새롭게 '짓기 시작한 집'인지 의문이 든다.
키퍼는 '탄생과 소멸', '시작과 끝'을 모호하게 표현함으로써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삶과 죽음이 일직선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닌 '순환의 과정'이자 허무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철학을 가진 키퍼의 세계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릴케의 시(詩)와 키퍼의 그림이 만나면?
전시장에 들어서면 '안젤름키퍼'가 사랑한 오스트리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詩)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릴케의 시 '가을날'(Herbsttag,1902), '가을'(Herbst,1906), '가을의 마지막'(Ende des Herbstes,1920)에 영감을 받아 전시를 기획했기 때문이다.
캔버스 위 '릴케'의 시가 적혀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이라는 동명의 작업도 시(詩)'가을 날'의 한 구절에서 가져왔다.
▷ 진짜 낙엽인가요?
그림 속으로 걸어가면 곧이라도 가을이 펼쳐질 것만 같다. 대형 캔버스 위 낙엽들은 사진보다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휑한 가을날 바람이 불어 흩어지듯 마구 떨어지는 낙엽들은 가을의 진수를 담았다. 간혹 실제 낙엽으로 착각하는 분들도 있다.
작품 속 낙엽은 '납'에 '금칠'을 더해 제작됐다. 연금술에서 납과 금은 '시작과 끝'을 나타내기 때문.
▷ 이달 31일까지만 열려요
'가을 Herbst' 전시는 납, 진흙, 밧줄 등 독특한 재료를 활용해 두께감과 입체감이 돋보인다.
대형 캔버스 위 그려진 황량한 들판 위 홀로 선 커다란 건물, 말라가는 나뭇가지, 흐트러져 낙하하는 나뭇잎과 눈부신 햇살.
그리고 점차 차가워지는 채색으로 가을과 겨울이 지나가는 과정 속 쓸쓸하고 아릿하다가도 따스한 희망과 온기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폐허와 희망'은 우리의 삶까지 꿰뚫는다.
헤레디움 함선재 관장은"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시공간의 이야기는 곧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헤레디움은 안젤름 키퍼의 전시를 시작으로 앞으로도 동시대의 예술적 영감과 감동을 전하는 수준 높은 미술 전시와 클래식 음악회를 통해 새로운 미래 유산을 만들어갈 것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