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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 바늘을 사 보내오"...500년전 남편의 애틋한 편지

대전시립박물관, 오는 28일까지 '최고의 한글 편지' 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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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3.05.11 18:03
  • 기자명 By. 고지은 기자
▲ 나신걸 한글편지. (사진=고지은 기자)

[충청신문=대전] 고지은 기자 = "분하고 바늘 여섯 개를 사 보내오. 집에는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 있을고. 울고 갑니다. 어머니랑 아기 모시고 다 잘 계시오."

1940년대 영안도(현 함경도) 변방에서 하급 장교로 근무하던 나신걸(1461~1524)이 고대하던 휴가를 가지 못하게 되자 충청도 고향에 있는 부인에게 쓴 편지 중 한 구절이다.

훈민정음 초기 고어로 상하 좌우에 걸쳐 빼곡히 채워 쓴 그의 편지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주 내용은 무관 공식 의복 등 필요한 물건을 보내주고, 소소한 가정사를 살펴 달라는 부탁이다.

통상 조선시대 남편이 아내에게 전하는 서신에서 그리움이나 사랑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 대한 애틋한 정을 '분과 바늘'에 무심한 듯 담아냈다.

당시 분과 바늘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가장 지니고 싶어했던 물건으로, 중국 방문 사절단이나 한양을 다녀온 사내들이 아내나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단골 선물이었다.

또한 그는 상관의 지시로 고향을 못 가게 된 속상한 마음을 '울고 간다'는 짧은 문장에 가득 담아 표현했다. '사내는 절대로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는 시대적 통념을 과감히 깨고, 붓 끝에 그리움을 묻혀 담담히 써내려 갔다.

"당신이 직접 농사 짓지 마세요."

이 구절에서도 직접 가족을 챙기지 못하는 가장으로서의 걱정과 세심함이 묻어난다. 또한 '당신'이라는 호칭과 높임말 사용에서 아내를 존중하는 마음은 물론, 15세기 언어생활을 엿볼 수 있다.

'나신걸 한글 편지'는 당시 사대부들이 서로 주고 받던 서신이나 관청 문서와 같은 중요한 사료도 아니고, 한낱 하급 관료의 사랑 편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늘날 훈민정음 반포의 실상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3월 9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편지는 국내 현존하는 한글 편지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지난 2011년 대전 유성구 금고동에 위치했던 신창맹씨 묘소 안 피장자 머리맡에서 발견됐다.

제작 시기는 1498년 이전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편지에 함경도 옛 지명인 영안도(1470~1498)가 쓰였다는 점, 나신걸의 군복무 시기가 1490년대라는 점을 보아 유추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불과 45년이 지난 시점,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지역(현 대전)까지 한글이 널리 보급됐음을, 당시 한글이 여성·평민 중심의 글이라고 인식됐던 것과 달리 남성·양반들 역시 실생활서 익숙하게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편지는 후손들의 기증으로 현재 대전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박물관은 보물 지정을 기념해 오는 28일까지 본관 3층 로비에서 '박물관 속 작은 전시: 최고(最古)의 한글 편지'를 연다.

▲ 오는 28일까지 대전시립박물관 본관 3층 로비에서 열리는 ‘박물관 속 작은 전시: 최고(最古)의 한글 편지’전 관람객이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고지은 기자)
▲ 오는 28일까지 대전시립박물관 본관 3층 로비에서 열리는 ‘박물관 속 작은 전시: 최고(最古)의 한글 편지’전 관람객이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고지은 기자)

이번 전시에서는 '나신걸 한글편지'의 실물을 물론, 도슨트의 해설과 함께 편지 전문 내용을 쉽게 감상할 수 있다. 더불어 발견 당시의 모습과 수습 및 보존처리·보물 지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한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양승률 학예실장은 "나신걸 한글편지는 지역명과 주고받은 사람, 시일 등이 모두 분명할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 반포 실상을 보여주는 언어학적 사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며 "올해 보물로 지정된 만큼, 많은 분들이 박물관을 찾아 함께 기념해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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