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기 동안 30명 남짓이 함께 단기 과정에 참여해 공부를 했다. 50대가 주축을 이룬 가운데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이 모여서 15주 과정의 학습을 마쳤다. 수료식을 마친 후 본격적인 친목모임이 출범했다. 교과 과정에 임할 때보다 분위기는 훨씬 자연스럽고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여럿이 모이면 유난히 붙임성이 좋아 상대에게 주도적으로 먼저 다가가고 각별한 친화력을 선보이는 유형의 멤버가 있다.
이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고 느껴지거나 서로의 신상정보 소개를 통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음을 알게 된 멤버에게 너무도 쉽게 “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이런 특성을 갖는 이들은 대개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확인되면 이내 “동생”이라고 부르며 하대를 한다. 사회에서 만나 알게 된 사람들에게 여간해 “형님”이나 “동생”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고향 또는 학교 후배라면 모를까 사회에서 만난 사람에게는 나보다 나이가 적어도 쉽게 하대를 하지 않는다. 더불어 누군가가 내게 하대를 하는 것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들에게도 난 존대어를 사용한다. 그런 만큼 나도 누군가에게 존대 받기를 원한다. 내가 사회에서 만나 사귄 사람 가운데 ‘형님’ 또는 ‘동생’이란 호칭을 사용하는 자는 극소수에 그친다. 모두에게 존대를 하는 것이 내 입장에서는 편하다.
한국은 유교문화권 국가로 분류된다. 그래서 삼강오륜이란 준칙을 온 국민이 가슴에 품고 산다. 삼강오륜의 강령 중 군신유의, 부부유별 등 일부는 사회의 변화 속에 퇴색했지만 뿌리가 너무 깊어 쉽게 바뀌지 않는 강령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장유유서(長幼有序)이다. 둘 이상이 모이면 나이를 따지고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깍듯이 존대를 하는 것은 한국인의 머릿속에 깊이 박힌 장유유서 사상에서 비롯된다.
호칭이나 경어 사용에 대해 나름의 원칙을 정하고 그것을 지켜가고 있지만 나도 한국인인 이상 누군가를 만나면 나이에 대한 궁금증을 감추지 못한다. 어떤 관계로 누굴 만나든 나이를 물어 상대가 나보다 몇 살이 많은지, 혹은 적은 지를 알아야 마음이 편해진다. 나이를 모르면 도대체 불편하고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다. 이런 현상은 나의 개인적 취향이라기보다는 50년 세월을 한국 사회에서 생활하며 자연스럽게 익혀진 문화습관이다.
지난 3월 첫 모임을 갖고 공부를 시작할 때는 구성원들에 대해 ‘어떤 일에 종사하고 있나’가 가장 궁금한 사항이었다. 15주의 학습과정을 지내며 각 멤버들이 어느 조직에서 어떤 위치에서 일을 하는지 파악하고 나니, 나이가 궁금해 못 견디겠다. 어차피 모든 멤버들에게 존대를 사용하고 있고, 나이를 알게 됐다 해도 존대어의 사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견딜 정도로 나이를 궁금해하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이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인의 뇌 속에 깊이 박힌 ‘장유유서’가 내게도 침투돼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부탁해 전 멤버의 출생연월일이 기록된 문서를 전달받았다. 그 이후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다. 외국인들은 절대 이해 못할 한국인만의 특성이다. 멤버들의 나이가 궁금해 못 견뎌 하는 나를 보면서 문화란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나이를 먹었어도 나잇값을 못하는 사람이 많고, 역으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사려 깊어 존경할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유독 나이에 집착한다.
나도 장유유서의 개념이 뼛속까지 박혀 있지만 사회에서 만난 나이 많은 선배에게 “형님”이란 호칭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형님” “동생”이라고 부르며 절친하게 지내다가 등 돌리고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봤다. 적어도 “형님” “동생”이라고 부르기로 했으면 웬만한 허물은 덮어주고 용서해줄 수 있는 사이라야 한다. 조금 서운하다고 외면하고 손가락질하려면 애초에 “형님” “동생”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게 내 생각이다.
김도운 한국안드라고지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