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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76>

5부. 비장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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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12.17 18:52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적장 아민도 머리 숙여 추모했다

글/ 남균우

이들의 눈밖에 나면 원님의 자리도 유지하지 못하고 쫓겨나는 판국이었다.

공흥병사로 부임한 남이흥은 그런 사정을 이미 알고 사정을 철저히 하여 기강을 잡겠다 결심을 했다. 부임해서는 죄상이 제일 악독한 한놈을 골라서 공개적으로 장살을 시켜버렸다. 이렇게 해서 기강을 잡았기 때문에 선량한 육방 관속이나 양인들에게는 추앙을 받았으나 세도가인 이이첨 세력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세도가인 이이첨의 영향 아래에 있는 사간원에서 공흥병사 남이흥을 파직시키라고 아우성이었다. 남이흥은 사람됨이 패저하고 행실이 추잡스러우며 잔혹하게 형장을 사용해 사람을 함부로 죽인다고 했다. 심지어 읍비를 곤장을 쳐서 죽이겠다고 위협하여 간통했다고 무고하면서 파직시키라고 했다. 임금도 사람의 생명을 중히 여기는데 함부로 사람을 죽인다고 파직시키라고 무려 7차례나 소를 올렸다.

임금은 남이흥의 일은 본도감사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했다. 그래도 사간원에서는 네 차례나 남이흥을 잡아다가 국문하여 율대로 죄를 정하고 파직시키라고 날마다 아우성이었다. 그래서 광해군은 남이흥을 체차하라고 사간원에 답하였다. 그랬어도 계속 사간원은 남이흥을 잡아다 국문할 것을 아뢰었다.

광해군은 사간원에 체차했다고 또 답했다. 그래도 사간원은 남이흥을 국문하고 율대로 죄줄 것을 또 요구했다. 그런데 공흥감사에게 지시한 남이흥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간통에 대한 것은 증거가 없고 사람을 장살시킨 것은 인정이 되나 직권 남용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 보고됐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이첨 세력의 아우성에 밀려 남이흥을 파면시켰다.

이런 사유로 남이흥은 파면을 당하고 귀가했다. 귀가할 때는 주민들이 나와서 상의(백의)를 벗어서 길에 깔고 남이흥 병사가 밟고 가도록 했는데 그 길이가 10리라고 했으며 이것은 최대 존경의 표시라고 한다. 얼마 있다가 남이흥은 경상우병사로 임명받았다.

남이흥의 부실 연안김씨 여란은 이이첨의 추종자들에 의해 재산을 다 빼앗기고 잔인한 횡포와 인권유린을 당했고 그들에 의해서 부모까지 여의어 천애고아가 된 처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사무친 원한을 남이흥 병마절도사가 풀어주었으니 여한이 없고 여기서 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남이흥께 여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하고는 해임을 당해 임지를 떠나는 그를 따라 나섰다.

남이흥은 자신을 따라 나서는 그녀를 여러 번 타일러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듣지 않고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말하기를, “저는 이제 원한을 다 풀었으니 여한이 있을 수 없고, 공께서 가두어주시지 않으신다면 죽는 길을 택하겠습니다”고 외치면서 완강히 되돌아가기를 거절하였다.

남이흥은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요구대로 부실로 맞이하여 같이 귀향하였다. 그녀가 당대에 이름이 높았던 연연김씨(여란)이다.

임진왜란 시 남이흥의 아버지 남유의 순국, 정묘호란 시 아들(이괄의 난 진압 시 일등공신) 남이흥의 순국, 손자 남두병의 활약, 남이흥의 부실 연안김씨의 순절, 남이흥의 사위 유효걸의 유공 등은 국난을 당하여 숭고하고 비장한 충의를 발휘한 사례다.

남이흥과 같은 훌륭한 상관 밑에서 적에 항거하여 성을 지키는 본래의 뜻에서는 촌보의 움직임도 없었던 것은 장돈이요, 성을 지키기 위하여 일문이 함께 죽은 것은 목사 김준 부자였다.

안주성이 함락되던 날 김준의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불 속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고, 김준의 첩인 양녀김씨는 후금군에게 잡히자 굴복하지 않고 충신인 남편을 따라 열녀가 되겠다고 욕을 퍼붓다가 죽었다. 이 김준 아들의 나라와 아버지에 대한 충효정신과 김준 첩의 열녀정신은 우리에게 숭고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한편 김준은 죽은 후에도 그 피부가 산 사람과 같았는데 그 고을 사람들이 울면서 그 시신을 거두어 관에 넣어 묻어 주었다고 한다.

박천군수(博川郡守) 윤혜는 안주성이 함락되던 날 서문장으로 후금군이 성 위로 올라오자 중영(中營)으로 달려가 남이흥과 함께 최후를 마치었으며, 안주 출신 함응수는 북문장으로서 끝까지 힘껏 싸워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했다.

남이흥의 모친 유씨부인은 정묘호란 당시 나이가 80이었다. 모친은 전년에 영변으로부터 집에 돌아와 겨우 반년이 될 즈음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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