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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되돌아가는 삶 모퉁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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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9.15 17:39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 정 희 시인. 둥그레동인회장

언덕의 무덤이 말끔하게 단장을 했다. 잰 걸음에 달려가 볕을 쬔다. 잔디밭에 앉아 하늘을 본다. 초가을 햇살이 금부스러기처럼 쏟아진다. 마른 바람은 우수수 가을을 쏟아내는데 청옥 같은 허공에 드문드문 새털구름이 흩어진다. 이름도 모를 무덤 속 주인공이 떠오른다. 인근 사람들의 말로는 200년도 넘었다니 벌써 한줌 흙으로 돌아갔겠다.

마음이 수수롭다. 오래 전에 있었을 한 사람의 죽음이 생각난다. 어느 날 죽어서 마침내 관이 묘 자리에 들어가던 날 가족들은 흙을 떠서 관 뚜껑 위에 던졌을 테지. 한 번 두 번 세 번 흙더미가 두텁게 쌓인다. 그 다음 인부들이 떠 올리면서 흙으로 완전히 뒤덮였을 것이다. 도돌이표라는 말이 생각났다. 삶 역시 세상 어느 악보에도 없을, 돌아갈지언정 즉시 멈추게 되는 도돌이표 때문에 원점으로 백지화된다.

사는 것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으니까. 뭔가 추구할지언정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돈을 추구해 온 사람들은 돈에 집착하다가 병을 얻고는 고치기 위해 평생 번 돈을 탕진해 버린다. 명예와 권세를 추구해 온 사람들 역시 원점으로 돌아가서야 하루 더 살아도 아쉽고 하루 덜 살아도 충분한 삶을 깨닫는다. 처음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원초적인데 영원히 살 것처럼 동동거린다. 하루 죽을 줄 모르는 격이지만 그 하루에 깃든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다.

날이 밝으면 하루를 시작한다. 부랴부랴 새벽을 걷어치운 뒤 조반을 준비하고 청소를 끝낸 다음 도서관으로 간다. 자료를 찾아 중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적어 두었다. 새참 때가 되면 준비해 온 과일과 간식을 먹는다. 쉴 겸 해서 도서관 뒤의 야트막한 구릉에 올라가면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목화솜같이 흩어진 새털구름과 꽈리처럼 엉긴 조개구름이 한가롭다. 곧 이어 바람이 불고 흩어진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삶이 또 다시 스쳐간다.

구름이 생기는 내력부터가 그랬다. 구름은 증발된 물방울이 올라간 수증기 덩어리다. 대기 중에 머물러 있다가 찬 공기를 만나 떨어지는데 바로 그 물방울 떨어지는 곳이 처음 떠나온 시냇가 혹은 강물 바다일 수 있기에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숲속이나 들판에도 떨어지지만 그 또한 강과 시내 혹은 바닷가 언저리였고 과히 빗나간 추측은 아니라는 뜻이다.

삶도 수많은 반복과 되풀이 속에 이루어졌다. 태양과 노을은 항상 그대로일지 모르나 작금의 우리는 떠오를 때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초가을, 달맞이꽃이 활짝 피면서 냇물이 차분해지고 선선한 바람과 함께 귀뚜라미 합창이 시작된 것도 작년 그대로다. 들판의 벼가 숙이면서 금가루를 흩뿌린 듯 반짝이는 것도 초가을의 참새방앗간이다.

바뀌는 하루와 절기도 시간만 다를 뿐 달라지는 것은 없다. 도돌이표라 해도 처음에는 악보 그대로 나가다가 마지막 혹은 바뀌는 시점에서 약간의 변수가 나오듯 어제와 똑같은 하루 역시 약간의 변수가 있어 지루하지 않다. 오차 없이 똑같다면 오히려 혼란스러울 테고 그 때문에 약간의 변화와 차이로 도돌이표의 음악적 효과를 드러낸다.

지나온 날은 수많은 되풀이로 점철된 여정이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60번의 사계절 스케치북을 감상해 왔다. 봄이면 도처에 만발한 진달래와 녹음과 단풍이 조목조목 들었다. 어느 해는 무심코 지난 해의 탁본을 보면서 끝날 때도 많았으나 생각하니 똑같은 정경이 재현되는 속에서 느끼지 못하고 얼결에 지나갔을 뿐이다.

계절도 그렇지만 삶 역시 똑같은 경로의 반복이다. 주변 사람들과의 다툼도 참을성 없이 내뱉은 말이 화근이었다. 보통 나이가 들면서 원만해지기는 하나 이따금씩 본성이 나오는 것도 뿌리는 두고 싹만 도려낸 결과 나온 실수다. 무성한 잎줄기나마 잘라낸 탓으로 호랑이가 새끼 칠 정도는 면했지만 일단은 근원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출 일이다.

도돌이표에서 시작할 때의 셈여림은 처음보다 뚜렷해진다. 악상도 점점 고조되면서 두드러진 변화를 주게 되듯 삶의 최종부분에서도 연년이 절기마다 중복되는 무료함은 달랠 수 있다. 짧지만 더러는 쇠털보다 많은 인생이라고 하듯 같은 상황에서도 조금씩 드러내는 차이 때문에 탄력이 붙는다. 가끔은 모든 걸 잃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가 전부 가지고 있을 때보다 행복해지기도 한다. 일사천리 나아가는 삶보다 필요에 따라 적절히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내실을 다지는 삶이고 싶다. 단조로운 것 같아도 악보에 변화를 주는 도돌이표 삶을 꿈꾸는 셈이다.

이 정 희 시인. 둥그레동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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