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세상사는 이야기] 고수레와 농부의 마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15.08.11 16:13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 정 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들판을 지나다가 우연히 새참 먹는 농부를 보았다. 밭둑에 앉아 혹은 시원한 그늘을 찾아 먹는 정경을 보니 신혼 때가 생각난다. 새참으로 수제비를 만들어 내 가면 일꾼들은 한 숟갈 떠서 밭둑에 던지고 일변“고수레”를 외치면서 식사를 했다.“고수레”는 들이나 산에서 음식을 먹을 때 첫 숟갈 떠서 던지는 것으로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우리 어릴 적만 해도 아주 흔한 정경이었다.

옛날 한 고을에 고씨 일가가 살았다. 어느 해 흉년이 들면서 마을 사람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해 이듬해 뿌려야 할 씨앗까지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감자와 고구마 심지어 볍씨까지 먹어 치우다 보니 논밭에 뿌릴 씨앗이 바닥나 버렸다. 봄비가 내려 땅은 촉촉해졌건만 아무것도 뿌릴 수가 없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마을 사람들은 어느 날 고씨네 일가만이 보이지 않는 걸 알았다. 이상히 여긴 끝에 가 보니 고씨 일가는 나란히 누운 채 죽어 있고 고씨의 머리맡에는 볍씨자루가 있었다. 굶어 죽으면서도 볍씨는 남겨 둔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가 있었고 풍년을 맞아 다시 잘 살게 되었다. 이후 밥을 먹을 때마다 한 숟갈 떠서 논둑이나 밭둑에 던지면서 고마움을 생각했다는 게 그 배경이다.

볍씨나마 먹고 겨울을 났으면 목숨은 부지했을 테고 차선책을 도모할 수 있었으련만 고씨 일가는 굶어죽어도 종자는 베고 죽는다는 전형적인 농부의 삶을 살았다. 식량을 먹어치운 마을 사람들이 농부의 본분에서 벗어났다는 건 아니고 죽은 고씨가 마을 사람들을 위해 볍씨를 남긴 것도 아니었지만 굶어죽으면서도 씨앗은 먹어치울 수 없는 애착 때문에 마을 사람 전체가 기근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게 인상적이다.

그 후 첫술을 떠서 고수레를 하는 농부들의 습속은 오랜 날 이어져 왔다. 들밥을 먹는 사람마다 그렇게 던져버리면 얼마나 낭비일까 했지만 개미와 두더지가 먹고 더러는 새들이 쪼아 먹을 수도 있다. 음식 하나를 앞에 놓고도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해 준 자연의 모든 것에 감사하고 거기 서식하는 모두를 배려하는 세심한 마음을 나타낸다.

농사는 농부가 짓는 거지만 날씨 등 여러 가지가 따라 줘야 풍작을 기하게 된다. 하다못해 두더지가 밭둑을 파헤치기라도 하면 순조로울 수 없다. 새들도 들판을 날며 해충을 잡아먹는다. 나락이 영글 때 쪼아 먹기도 하지만 자랄 때 생기는 벌레와 병충해로 소출이 줄기도 한다. 그에 대한 예방책이라기보다 먹을 것을 나눠 주면서 피해를 줄이는 것도 방법이 된다는 의미다.

논밭에서 일을 하다 보면 대부분 허기가 지게 마련이다. 그 바람에 급히 먹고 탈이 나기도 하는데 첫 숟갈을 떠서 잠깐 고수레를 하고 먹는 게 건강에도 좋다. 공기가 맑아서 소풍 나온 기분이지만 풀밭 아니면 밭둑이라서 여러 가지로 불결한 만큼 탈이 생길 수도 있음을 방지하는 것이다.

고수레에 관한 의미에서 가장 인상적인 거라면“농부는 죽어도 종자는 베고 죽는다”는 배경이었다. 먹을 게 없어도 다음 해 농사를 위해 아끼는 농부처럼 우리에게도 농부의 씨앗과 같은 가치관 내지 이상은 있다. 나름대로는 지킨다고 하지만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해 버린다. 종자를 베고 죽은 농부가 씨앗을 지킨 덕에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된 것처럼 여하한 환경에서도 추구하는 바를 지킨다면 충분히 보람찬 삶이 될 수 있다.

아울러 상황에 따라 뭔가 포기한다 해도 위기는 모면하기 어려운 점을 말하고 싶다. 그럴 경우 일은 해결되지 못한 채 소중한 꿈은 꿈대로 무산되는 게 보통인 만큼 함부로 포기하면서 오점을 남기는 일은 없어야겠다. 죽음을 택하면서 씨앗을 지킨 농부 때문에 천행으로 살아난 마을 사람들이 고마운 심정으로 고수레를 하는 것은 애틋한 일이었으나 농부는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는 속담의 배경은 더더욱 눈물겹다.

고수레의 의미를 돌아보고 나니 단순한 습속 하나에도 많은 의미가 있음을 알겠다. 나도 먹고 너도 먹고 함께 살자는 공동체 의식이며 죽을지언정 씨앗을 지키는 그 마음은 또 각자의 삶에 있어 반드시 지켜야 할 본분을 뜻한다.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의 소신을 지킬 줄 안다면 훨씬 더 가치 있는 삶이 된다는 것을 숙지해 본 것이다.

이 정 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