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의 일이다. 해빙기를 맞아 학교 시설의 안전을 점검하던 중 모 학교의 중앙현관 계단을 살펴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 학교의 계단은 단 높이와 단 넓이가 2~3㎝씩 높거나 좁은 것이 들쑥날쑥하다. 계단의 재료는 인조석 갈기로 조잡하게 마감하여 비위생적이고 거칠어 불결하기 짝이 없다.
학교 계단은 다른 건물 계단과 달리 다수의 학생이 일시에 우르르 몰려 오르내리는 특수성이 있다. 이따금 학생들은 군중심리에 장난기가 발동하여 예기치 못한 돌발사태의 위험이 상존한다. 더욱이 계단의 디딤판이나 높이가 일정치 않으면 변을 당하기 일쑤이다. 여러 학생이 함께 출입하다가 만일 한 학생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연쇄적으로 넘어져 치명상을 당하는 사례가 왕왕 있다.
문제의 계단은 서둘러 위험시설로 지정하고 긴급히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힘든 공사임을 무릅쓰고 기존 계단을 카터기로 송두리째 잘라냈다. 그 위치에 구조적으로 시공하여 정성껏 계단을 설치하였다. 바닥 재료는 고무계 타일로 마감하여 산뜻한 분위기가 묻어나도록 했다. 고심 끝에 완성한 계단이기에 마음 한구석 뿌듯하다.
또한 청주의 상징적인 건물로 지어진 충북교육연구원의 전시동은 철계단으로 비교적 불에 잘 견디고, 안전하게 경쾌한 구조로 되어있다. 옥에 티처럼 계단과 계단 사이가 띠어 있어 찾아온 방문객들이 계단을 이용할 때 속옷이 노출되기도 해 부득이 챌 판을 설치하여 이를 해소한 일이 있다. 간혹 짓궂은 사람들은 전시동에 또 하나의 볼거리가 사라졌다고 의미 있는 농을 던진다.
내가 근무하는 직장의 사무실은 제일 높은 층에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수시로 오르내리는 것이 무척 힘들 때가 있기도 하다. 간혹 피로할 때는 한 계단 오르는 것도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기분 좋을 때는 세 계단씩을 한 번에 올라도 가뿐가뿐하다.
실은 계단을 오를 때, 발바닥의 가운데 움푹한 용천혈을 계단에 딛고 오르면 ‘용천혈로’ 작용을 하여 건강에 좋다. 어느 때는 두 계단, 세 계단을 건너 오르다 직원들과 부딪히면 쑥스럽고 어색하기까지 하다. 이제는 동료들이 함께 동조하며 즐거워하니 마음이 편하다. 오히려 고층에 사무실이 있어 체력 증진에 도움이 된다고 껑충껑충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무척 활기차다. 내가 최고위층에 있으니 고위급이 아니냐고 스스로 반문하며 혼자 빙그레 미소를 띠기도 한다.
같은 상황에 부닥쳐 있어도 생각 여하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라는 말처럼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생각하고 망상에 잠겨보기도 한다. 이를 기회로 체력 증진도 하고 일석 삼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높은 층을 걸어 올라가는 일이 결코 짜증스럽기보다는 즐겁게 느껴진다. 스트레이트의 계단은 스트레스의 산물이다. 그러나 우리 음주문화의 직설법이 한국적 풍류 문화의 살인자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우리나라는 암울했던 구시대의 갖가지 모순에 의해 발기발기 찢기고 노략질당한 우리 국민의 순정이 어찌 풍류 없이 술집을 떠날 수 있을까. 그래도 역시 문화는 스트레이트 적인 것이 아니고, 칵테일적인 것이리라. 적어도 계단만은 칵테일적인 쪽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정서가 아니겠는가.
계단의 직설적 의미를 초월하여 포괄적 공간으로서의 계단, 때로는 앉아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무대도 되는 선택적인 마당으로서의 계단이면 더욱 좋겠다. 그렇게 될 때 집은 정감이 흐르고 친근감이 들 것이다. 하나의 장치는 보편적인 위상을 뛰어넘을 때 삶의 동반자인 공간으로서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지 않을까.
계단에는 계단참을 여러 개소로 만들어 피로를 덜어주고 태양열 리움(Solarium)과 같은 공간을 연출하여 작은 정원을 꾸미는 것도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산속의 오솔길에 저절로 생겨난 자연석의 계단을 관찰하면 S 커브를 가진 계단도 만들어졌다. 계단을 한층 발전시켜 아래위를 통하는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적인 면에 그치지 않고 축복해 주는 공간으로 가꾸고 싶다.
우리가 늘 접하는 계단은, 공간이 4차원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소이기도 하며, 흥미를 더해 역동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기 위해서 계단실은 밝아야 한다. 휴식공간으로서 실내정원을 조성해 보자. 특수채광 장치를 끌어들여 외부 공간과 다양한 접목을 통해 예기치 않은 일들을 체험할 수 있는 인간적인 공간으로 녹아들도록 해 보자.
계단에서 사람들은 시선의 오르내림을 주고받으며 대화도 나누고 편안히 앉을 수도 있다. 세상에는 별난 계단도 많다. DNA처럼 생긴 이중나선형 계단도 있고, 통나무에 톱니자국만 내고 사용하는 소박한 계단도 있다. 디딤판 모양도, 네모, 세모, 동그라미 등 계단이 아니라 마치 조각품처럼 보인다.
건축가 ‘찰스 무어’는, “계단은 아르키메데스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한 번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몇 개의 작은 움직임으로 가능하게 하는 기계적 장치이다.”라고 했다.
한 번으로는 다 마실 수 없는 술을 여러 번 나누어 마시거나 칵테일을 쉽고 별나게 마시는 것처럼 계단이 거부감을 주고 고통을 주는 이유는 짧은 시간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축가는 능숙한 바텐더(bartender)의 심정으로, 우리 모두 정성을 다해 친근감과 활력을 더해주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공간으로 가꾸어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