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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천사의 섬에 가다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건축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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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3.11.19 15:12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건축학과 객원교수

천사의 섬에 코로나로 무려 3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던 대학 동기들이 연초에 부부 동반으로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때 23만 명이 희생된 최대 격전지이다. 일본군의 집단자살 현장인 낙하 외곽의 마부니, 언덕에 조성된 평화 기념공원에는 파도를 형상화한 비석에 희생자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그중에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1만 명의 한국 청년 중 신원이 확인된 313명의 이름도 눈에 띈다. 1975년 광복 30주년을 기념해 세운 한국인위령탑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쓴 비문과 이은상 시인의 ‘영령들께 바치는 노래’가 새겨진 비문이 가슴으로 안겨 온다.

지난 10월에는 의기투합하여 자은도(慈恩島)에서 다시 만나니 꿈만 같다. 전국에서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며 만학의 꿈을 펼친 대학 동기들이기에 끈끈한 정은 남다르다. 졸업 후 35년간이나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영광에는 서해의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백수 해안도로가 있다. 길게 이어진 해안도로 끝 모래미 해변에 다다르니 이미 학우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부둥켜안고 환호했다. 식당에 들어서니 잘 차려진 굴비와 간장게장 등 푸짐한 한 상 차림이 입맛을 돋운다. 이곳은 마른 굴비 백반과 간장게장, 애호박 찌개, 조개 무침, 찜닭, 생선 매운탕 등 영광에서 맛볼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식사가 준비되어 우리의 만남을 축하해 주는 듯하다.

우리의 여정인 신안군은 전라남도 황해상 다도해의 군이다. 압해도, 암태도, 자은도, 증도, 팔금도, 안좌도, 도초도, 비금도, 임자도, 신의도, 하의도, 장산도, 지도, 흑산군도 등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사대교(千四大橋)는 압해읍의 압해도와 암태면의 암태도를 연결하는 연륙교이다. 국내 최초 사장교와 현수교를 동시에 배치한 교량으로 총연장은 10.8km로 가히 장관을 이룬다. 신안군 비금도, 도초도, 하의도, 신의도, 장산도, 안좌도, 팔금도, 암태도, 자은도 9개 면 섬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펼쳐진 일명 ‘신안 다이아몬드 제도’를 연결하는 최단 거리 육상 교통망을 연계한 것이다.

자은도(慈恩島)는 임진왜란 때 중국인 두사춘(杜四春)이 반역으로 몰려 피신 왔다가 자은도에 도착하여 보니 난세에도 생명을 보존하게 됨을 감사히 생각하고 베풀어준 은혜를 못 잊는다고 하여 자은도라 부르게 되었다.

자은 백길해수욕장의 광활한 모래밭에 서면 여기가 과연 우리나라인가 싶을 정도로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진다. 3km가 넘는 광활한 해안선을 따라 고운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지고 수심이 얕은 끝없는 모래밭이 펼쳐진다. 백길해수욕장뿐 아니라 자은도에는 사월포를 비롯하여 분계, 면전, 신성, 양산, 내치, 대섬, 둔장 등 9개의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있어 휴양지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섬이다.

지난날에는 뱃길이 멀어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지만, 암태도와 자은도 사이에 은암대교가 개통된 이후로는 많은 피서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은암대교 위에서 바라보는 낙조 또한 일품이다. 주변의 수많은 노송의 군락은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준다. 지명 유래에서 보듯 자은 사람들의 다정다감한 품성과 고장의 훈훈한 인심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자은면은 특산품 마늘의 주산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은암대교의 개통으로 육지와 더 가까워진 자은도는 여러 가지 특산품과 개발 여지가 많은 관광자원을 안고 있어 서남해상의 중심 도서로 떠오르고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니 상쾌하다. 도로의 끝에 가까워질 때쯤 목포와 신안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증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도라는 섬을 거쳐야 한다. 육지에서 섬으로, 또 다른 섬으로. 두 개의 다리를 건너 바다를 넘어가야 비로소 증도의 땅을 밟는다. 원래 증도는 염전으로 유명한 섬이다. 증도의 소금밭이 광활하다. 염전 안팎은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습지가 온전히 남아있고, 그곳을 터전 삼아 온갖 해양 동식물이 번성한다. 증도로 들어오는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육지 사람의 왕래가 쉽지 않았던 덕에 습지의 생태 환경은 보전 상태가 매우 뛰어나다. 그 덕에 람사르습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국가 습지보호지역, 갯벌도립공원 등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4관왕의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증도는 염전도 유명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유명한 것이 방풍림이다. 증도의 염전에서 섬을 반 바퀴 돌아 반대편으로 가면 엄청난 규모의 숲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의 발리’라는 별명이 붙은 우전해변 바로 뒤에 있는 숲이다. 숲은 10만 그루의 소나무로 채워져 있다. 90만㎡의 방대한 규모다. 이렇게 해변을 따라 조성된 해송 숲은 원래 방사림이다. 바닷바람에 실린 모래가 농경지로 날리는 것을 막기 위해 심은 소나무가 대체로 50~60년생이다. 한국전쟁 직후에 심은 게 자연의 풍화작용과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빚어낸 걸작이다. 증도를 일주하는 도로를 따라 달리다 숲의 경치에 반해 자기도 모르게 들어오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한 번에 섬 3곳을 걸어서 여행할 수 있는 이색 명소가 있다. 마을 지붕부터 도로, 휴지통, 식당 그릇까지 보랏빛 일색인 전남 신안군 보라색 섬이다. 퍼플섬은 안좌도 부속 섬인 반월도와 박지도를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다. 보라색 옷이나 신발, 모자 등을 착용하면 입장료가 면제된다.

신안군은 섬 천국이다. 유인도와 무인도를 합쳐서 1000개가 넘는다. 흑산도나 홍도처럼 잘 알려진 곳도 있지만, 이름조차 처음 듣는 섬이 대부분이다. 반월도와 박지도 역시 미지의 섬이었으나, 퍼플섬으로 단장한 뒤 세계적인 관광지가 됐다. 2021년 유엔 세계관광기구(UNWTO)가 선정한 ‘세계 최우수 관광 마을’에 들었고, 같은 해 한국관광공사 ‘한국 관광의 별’ 본상을 받았다. 안좌도와 반월도, 박지도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보라색 해상보행교로 이어진다. 보행교만 따라 걸어도 족히 30분은 걸린다. 문브릿지는 배가 지날 때 부잔교가 열리는 전천후 교량이다. 이처럼 자은백길해변과의 여유로운 만남은 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휴식이다. 우리 일행은 바다와 하나가 되는 생명의 푸르름과 맞닿아 있는 곳에 여장을 풀었다.

답답한 일상에 지쳤을 때 바닷가에 가서 넓고 푸른 바다를 보며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다.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저 멀리 보이는 흰 구름, 투명한 얕은 바다 밑으로 보이는 깨끗한 조약돌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늘과 바다가 맞붙어 있는 풍광을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도 그 속에 하나가 되어버린다.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밀려오는 파도가 없었다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어려웠을 것이 분명하다. 등대와 느릿느릿 움직이는 바닷물이 하나가 되어 차분함이 돋보인다. 나 자신을 돌아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분주하게 살아왔다.

등대와 바다는 빠르지 않다.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하얀 거품이 없었다면 바닷물은 아예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연륜을 더하며 느림이 때로는 소중한 것임을 느낄 때가 많아진다. 무엇보다 음미하고 반추하면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졌는지를 깨닫게 된다.

만학의 우정을 간직하며 우리는 천사의 섬 여정 내내 개성 있는 담소와 위트로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확 날려 버렸다. 더욱이 전국 각지에서 건축의 전문가로 역할을 다하는 학우들이 자랑스럽다. 여행은 걸어 다니는 스승이다. 천사 개의 섬이 천사(天使)의 섬이 되는 길을 몸과 마음으로 노력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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