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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11월.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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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3.10.31 15:32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11월. 어느새 계절은 가을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하늘은 청량하고 출근길에서 마주하는 사물은 어제보다 한층 붉어지고 짙어져 있다. 어느 길 위에선 성미 급한 가랑잎이 떨어져 나뒹굴기 시작한다. 요즘 내게 詩를 가르쳐주는 시인이 지난주 소백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왔는데 이미 잎이 모두 사라진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 울긋불긋 화려함으로 대변되는 가을이지만 쓸쓸함도 더불어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은 곧이어 사라질 풍경임을 알기 때문이다.

인디언 연설문집을 모아 류시화 선생이 엮어 만든 책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 속에는 인디언 달력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숫자상의 한 달, 두 달이 아닌 자연의 섭리가 스며든 아름다운 문장으로 설명하는 달력이다. 인디언의 달력에는 11월을 무엇으로 표현했을까. 대략 스무 가지 정도의 정의가 쓰여 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들의 말대로 11월은 거두어들이는 달이기도 하지만 ‘모두 다 사라지는 것만은 아닌 달’이 맞다. 낙엽은 땅속으로 들어가 밑거름으로 내년을 기약하고 농부는 여름내 흘린 땀방울을 곳간에 들여놓는다. 학교는 학습발표회라는 이름을 달고 그간 배운 실력을 무대 위에서 뽐내며 한 해를 정리한다. 글을 쓰는 문인들은 연말 문집을 꾸려야 하므로 여기저기에서 들어오는 원고 청탁으로 정신이 없다.

며칠 전 벼농사를 적지 않게 짓고 사는 이가 수확을 했다며 햅쌀을 팔아달라고 했다. 어차피 마트에서 사 먹는 쌀이라 가져다 달라고 했더니 노란 호박을 함께 대동해 햅쌀을 가지고 왔다. 햅쌀도 호박도 반짝반짝 윤이 났다. 따스한 봄볕에 꽃을 피워 뜨거운 햇빛과 비와 바람을 잘 견디며 실하게 영근 농작물임을 농사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쌀을 팔아줬으니 고마움의 표시로 호박 하나를 주고 간다는 농부의 마음이 노란 호박의 속처럼 따뜻했다. 이 마음을 나는 내 기억에 저장해 두기로 했다.

씨를 뿌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자국 소리를 들려주며 키워낸 농작물을 하나씩 거둬들이느라 들판의 농부들이 한껏 바빠졌다. 안주인들은 김장 준비도 할 것이다. 배추를 절이고 무를 썰고 온갖 양념이 동원될 것이다. 김장은 앞으로 다가올 긴 겨울의 일용한 양식으로 여름내 흘린 땀방울을 들여놓고 음미하는 지난해의 추억이다.

어느 한 지인은 집 앞에 밤나무가 아름드리 입을 벌리기 한창이라 새벽이면 밤 줍는 재미에 빠졌다며 사진 한 장을 보내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부럽던지 주말에 놀러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흔쾌히 허락하는 이에게 만사를 제치고 주말 아침 달려가 함께 밤을 주웠다. 토실토실한 알밤을 주우며 생각한 건 ‘시간’에 대한 상념이었다. 통통하니 입을 벌리고 드러누워 있는 밤송이에게서 시간의 소리가 들렸다. 봄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만들었을까? 누구에게도 있었을 시간, 내 안의 알밤은 어떤 모습일까? 그날 내가 주운 건 알밤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한 해 가까이 내가 만든 나의 열매를 찾아보는 일이었다.

11월이 시작되었다. 코로나가 거의 종식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는 올해, 무던히도 바쁘게 뛰어다니며 살았다. 하루 여덟 시간 직장생활 짬짬이 청탁 원고를 쓰고 문학단체 일도 도맡아 하며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신으로 버텼다. 도대체 왜 이렇게 바쁘게 사는가? 고뇌 아닌 고뇌도 많이 했다. 하지만 결국 나를 알아주고 다독여주고 도와주려는 좋은 사람들이 옆에 있어 기운을 내고 있는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건 올 한 해 나의 가장 큰 수확이다. 그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이 사라지지 않도록 나는 두고두고 오래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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