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으로 출발해야 하는 그날 아침이었다. 아버지는 장남의 부축을 받으며 마당을 가로질러 어지러이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음을 내딛으셨다. 대문 밖 길가로 줄지어 핀 코스모스가 한창 예쁜 날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너른 들에는 노랗게 벼가 익어가기 시작해 반짝반짝 눈도 부셨다. 아버지가 대문 문설주에 손을 붙들고 잠시 멈칫했다. 그러곤 잠깐 앉았다가 가자며 평소 당신께서 즐겨 앉던 나무의자를 가져오라 시켰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앉아 계시는 의자였다.
한참 동안 대문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느리게 말을 꺼냈다. “낳은 지 백일 지난 우리 다섯째를 품에 안고 오종종하니 큰 애들과 할머니, 할아버지 모시고 오십 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지. 어느 양반댁이 살았을 법한 커다란 기와집에 웅장한 나무 대문이 아주 잘 어울리는 좋은 집이었어.” 특히 명절이면 대문 여닫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단다. 집 안에 어른들이 계셨으니 새해가 되면 신년 인사를 하느라 동네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고, 추석이면 고향을 찾아 돌아온 자식들이 문안 인사차 수시로 찾아왔다. 동네 이장을 도맡아 하고 계셨으니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밤낮 가리지 않고 문을 두드리는 통에 한때는 대문을 아예 열어놓고 살기도 했단다.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얘기는 할머니께 자주 듣던 말이었다.
아버지의 한 말씀 한 말씀에 구구절절 오십 년 가까운 세월의 회한이 뚝뚝 묻어났다. 누구보다 혈기 왕성했고 부지런했던 아버지는 이 집에서 지켜야 할 식구들이 있었기에 매운 세월 앞에서도 봄부터 겨울까지 쉬는 법이 없었다. 몸으로 부딪쳐가며 사계절을 보내셨다. “뒷산으로 진달래며 단풍이며 대궐을 이뤄 그야말로 그림 같은 집에 살게 되었다고 느그 엄마가 참 좋아했는데…. 장독대며 담장 아래 화단이며 느그 엄마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지.”
차에 오르며 아버지는 엄마를 마지막으로 당부하셨다. 자식들은 저마다 자주 찾아뵙겠다는 말과 함께 엄마도, 집도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켜 드렸다.
기억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어머니마저 그날만큼은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셨다. 아버지를 향해 짧게나마 미소로 대화를 나누고 손을 잡고 장남의 차에 오르는 아버지의 등도 토닥이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떠나고 난 후 아직도 남아 있는 따뜻한 체온의 아버지 의자에 앉아 앞산을 멍하니 바라보셨다. 그리곤 머리가 아프다며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눕는가 싶더니 이내 등을 돌려 한숨 섞인 흐느낌을 보이셨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놓고 엄마는 한동안 앓아누우셨다. 기억이 돌아오는 날이면 아버지께 가야 한다며 짐을 싸셨고, 기억이 희미한 날에도 아버지를 찾았다. 젊은 시절 복닥복닥 자주 투닥이던 날도 많았지만, 부모님은 긴긴 세월 은연중에 그렇게 서로의 삶에 스며들었나 보다.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셔놓고 첫 번째 맞이하는 추석날, 자식들은 명절을 요양병원에서 아버지와 함께했다. 외출증을 끊고 햇빛 좋은 잔디밭에 돗자리를 마련해 저마다 준비해 온 음식으로 명절 상을 차렸다. 무덤덤한 아버지는 맛있게 송편 한 조각 드시는 것으로 대답을 하셨다. 마주 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사이 아버지가 웃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눈물이 났다. 하나가 가면 다른 또 하나가 오는 것, 그것이 삶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