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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그 여름의 잎새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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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3.07.11 13:56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시집 『그 여름의 끝』에 놓인 표제 詩 ‘그 여름의 끝’의 첫 문장이다. 몇 차례 폭풍에도 나무 백일홍은 붉은 꽃을 매달았다. 그 여름, 시인은 폭풍의 중심에 서 있었다. 시인의 절망은 붉은 꽃으로 피어났지만 어떤 폭풍우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다시 타올라 피어났다. 그리고 좁은 마당이 핏빛 꽃으로 가득할 때 시인의 절망도 끝이 났다.

어느 해 여름, 나도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던 적이 있었다. 칠월이 이제 막 시작하려던 때였다. 들깨 모종을 심으러 뒷밭에 나간 엄마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연락을 받은 건 아주 늦은 저녁이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난 후 동네 하천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오던 찰나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가 쓰러졌는데 다행히 지나던 이웃집 아저씨가 발견해 아버지와 함께 병원에 모시고 와 있다는 전갈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가 낮의 광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바로 차를 몰아 병원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구급차에 실려 근처 병원 응급실로 엄마를 이송시켰단다. 그러나 의사의 눈에도 심상치 않았는지 바로 권역 응급 의료센터로 옮겼다고 했다. 그야말로 하루가 한 달처럼 길었을 그날이었다.

그해 여름을 고스란히 병원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보냈다. 온통 주름으로 채워진 얼굴에는 쓰러지면서 생긴 충격으로 든 멍이 여러 날 사라지지 않았다. 코와 입을 틀어막은 여러 호스는 한눈에 봐도 얼마나 위급한 상황인지를 말해주었고, 하루 한 번 뵐 수 있는 면회 시간이면 눈도 뜨지 못하고 미동도 없는 엄마를 향해 눈물 콧물을 섞어가며 온갖 말을 걸었다.

보호자 대기실 밖으로는 여름이 한창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칠월의 녹음이 절정을 향해 깊어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느 집 텃밭 정도로 보이는 땅에서 자라고 있는 옥수수와 들깨였다. 온종일 병원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 앞에서 긴장으로 뭉쳐 있다가 밥 한 끼 먹으려 밖을 나서면 식당으로 가는 길목에 요목조목 알뜰하게 꾸며놓은 작은 텃밭이었다.

처음엔 그저 무심히 지나치다가 어느새 점점 제 키를 늘리는 모습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들깻잎이 무성해 고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튼실했고 옥수수는 나날이 하늘을 향해 반짝반짝 이파리에 윤을 냈다. 엄마가 쓰러지던, 그날 심었다던 들깨도 아마 지금쯤 저 모습처럼 자라있으려나. 하루하루 푸르게 자라나는 그 모습에 말할 수 없는 힘을 얻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生과 死가 오가는 병원에서 창밖의 푸른 잎새를 바라보며 그 폭풍을 견뎌냈다.

긴 시간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에 머무르다 보니 어느새 다른 보호자들과도 말로 할 수 없는 진한 동료애가 생겨났다. 처음엔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주고받는 일로 시작해서 급하게 볼일을 보러 나가면 기꺼이 보호자 노릇을 했다. 행여 슬픈 일이 있으면 어깨를 내어주고 일반실로 옮긴다는 말을 들으면 진심으로 함께 기뻐했다. 긴 시간 막막하기만 한 날들을 버텨낸 건 병원 안에서 만난 이런 사람들과 밖에서 잠시나마 눈을 쉬게 해 준 초록의 텃밭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는 깨어났다. 한여름 몇 차례 지나간 태풍에 맞서 꿋꿋하게 자라난 옥수수처럼, 혹독하리만치 유난히 잦은 비에도 실하게 영근 들깻잎처럼 엄마가 눈을 떴다. 그 의지가 더없이 고마웠다. 함께 동고동락하며 희비를 함께했던 분들께도 감사했다. 창밖의 초록 잎새도 반가운지 하늘하늘 이파리를 흔들었다. 그 여름 힘든 시간을 견뎌 나의 절망도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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