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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식목일 아침 단상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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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3.04.04 15:12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어느 해 봄이었다. 봄꽃이 만발해 온 세상이 화사하던 주말 아침, 강원도 바닷가로 차를 몰았다. 하늘빛 푸른 바다를 상상하며 속초를 향해 내달리는데 그날따라 바람이 많이 불었다. 그리고 더없이 맑고 청량한 내 머리 위의 하늘과는 다르게 저 멀리 산 너머로 검은 구름이 잔뜩 피어오르고 있었다. 산불이 난 것이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나들이를 나온 여행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길가에 차를 세우고 먼발치에서 산불을 바라보았다. 산불은 바람을 타고 매캐한 냄새를 동반한 채 능선을 따라 끝도 없이 붉은 띠를 내둘렀다. 이듬해 그 길을 또 지나는데 주변 산불의 흔적은 깊고도 참혹한 상흔을 남겼다. 아름드리였을 법한 나무들이 타다남은 채 뼈대의 흔적만 있었다. 새소리는커녕 흙빛마저 생명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산불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때 처음 알았다.

이른 아침 문득 그날을 떠올린 것은 오늘이 바로 식목일이기 때문이다. 삼라만상이 맑고 화창해 나무를 심기에 적당하다는 식목일 아침, 건조한 날씨에 전국 곳곳에서 산불 소식이 들려온다. 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맞아 이제 본격적으로 흙냄새를 맡기 시작한 산과 들이 누군가의 실수로 한순간 재가 되어 버렸다. 어느 지역에서는 산불이 민가까지 내려와 하루아침에 삶의 터를 잃고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한숨 쉬는 노인의 모습도 뉴스에 보인다. 마음이 저릿해 온다. 하루하루 시간을 쌓아 오랜 세월 터를 지켜온 나무들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감내해야 전처럼 푸른 빛의 생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나무를 심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라고 있는 나무를 지켜야 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종종 깨닫는다. 한 그루의 작은 묘목이 큰 재목의 나무로 우뚝 서기까지 견뎌야 하는 인고를 안다면 말이다.

고대 인도의 위대한 왕 아쇼카는 모든 국민이 최소한 다섯 그루의 나무를 심고 돌보아야 한다고 했다. 치료에 쓰이는 약나무와 열매를 맺는 유실수, 땔감 나무와 집을 집는 데 쓸 목재용 나무, 꽃을 피우는 정원수를 심을 것을 권장했다. 그는 이것을 ‘다섯 그루의 작은 숲’으로 불렀다고 한다.

나무를 좋아한 아버지는 해마다 식목일이면 나무를 심었다. 주로 약나무와 유실수를 많이 심었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던 해에는 대문가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대문 양옆으로 포도 넝쿨이 무성히 자라 동네에서 가장 예쁜 집에 산다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오빠가 중학생이 되었을 땐 앞마당에 감나무를 심으셨고 뒤뜰 모과나무는 언니가 이른 나이에 결혼하고 집을 나설 때 그 헛헛함을 잊고자 심었단다. 하나둘씩 자식들이 성장해 타지로 나간 후 아버진 마을 어귀 첫 자락에 느티나무를 심어놓으셨다. 한여름 뙤약볕에 일하는 농부들은 그 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어가며 땀을 식히기도 하고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삼삼오오 모여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랑방 역할도 해주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의 고향은 어느새 ‘느티나무 그 동네’로 이름이 붙여졌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도 나무가 꽤 많은 편이다. 봄이면 목련이 꽃을 피우고 대추나무가 초록 잎을 달기 시작한다. 어느 동 저층 창문 앞까지는 모과나무가 쑥쑥 커 올라 아름다운 정원의 역할도 하는 것 같아 부럽기까지 하다. 이곳으로 이사와 어느새 스무 번의 계절을 겪어내는 동안 주변의 나무는 나날이 가지를 늘렸다. 그리고 어느새 숲을 이뤄 그 풍경이 더할 나위 없다. 근처에 새 아파트가 들어서고 온갖 현혹된 말로 입주를 유혹하지만 끄떡도 하지 않는 이유는 이 나무들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가 주는 즐거움이 계절마다 다르게 전해온다. 더불어 오래전 누군가가 심어놓은 나무들로 지금의 즐거움을 거저 얻고 있으니 다섯 그루는 아니더라도 최소 한 그루만이라도 심어 후일 누군가의 즐거움이 될 수 있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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