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늦가을 텅 빈 텃밭을 그저 둘 수 없어서 대파 모종을 심어두었다. 여름내 아이들과 땀 흘리며 키워낸 땅콩과 고구마를 수확하고 난 후의 일이었다. 유난히 폭설이 잦았던 지난겨울 눈 속에 파묻히길 여러 번이었을 게다. 추우니 창문을 꼭 걸어 잠그고 한 계절이 지나도록 잊고 있었는데 우연히 내다본 텃밭에서 어린 대파 싹이 고개를 내밀어 계절을 알려왔다. 멀리서 친한 벗이 찾아온 듯 반가웠다. 겨우내 깊은 땅속에서 때를 기다리며 꿋꿋하게 햇빛과 바람을 불러내 마침내 봄이 온 것이다.
5일마다 열리는 집 근처 오일장의 장터에도 봄은 왔다. 곳곳이 봄나물을 파는 할머니들로 시장통이 북적였다. 봄이면 제일 먼저 돋아나와 긴 겨울, 잃었던 식욕을 되살려주는 냉이가 눈에 많이 띄고 달래도 한 자리 차지하고 손님을 기다린다. 시장 한 바퀴를 휘휘 둘러 돌고 나오는 길에 머리칼 하얀 할머니 앞에서 발을 멈췄다. 더불어 꼭 시골 어느 넓은 밭고랑에서 캤을 법한 냉이를 팔고 있는 모습에 저녁 반찬 걱정을 내려놓았다. 오래 묵힌 집된장을 한 국자 풀어 넣은 다음 장터에서 산 냉이를 다듬어 콩가루를 묻혀 끓이면 그 맛은 천하일품이 틀림없다. 그리고 오늘 저녁 밥상에는 맛있는 봄이 오르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 그때는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들로 산으로 나물을 캐러 다녔다. 가장 많이 캤던 것이 아마도 냉이였을 것이다. 겨우내 황량하기 그지없던 들녘으로 봄바람이 불고 햇빛이 온순한 날이 이어지면 지천에 냉이가 돋아났다. 할머니가 알려준 대로 호미를 이용해 속살 하얀 냉이 뿌리가 보일 때까지 파 내려가다 보면 흡사 땅속에서 보물을 건져 올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한나절만 캐도 소쿠리로 하나 가득 채울 수 있던 시절이었다. 데쳐서 참기름 한 방울 넣고 조물조물 나물을 만들고 밀가루를 입혀 튀김으로, 솥단지 한가득 된장국으로 끓여 밥상에 올리면 눈과 입으로 온통 봄이 들어왔다. 할머니를 따라 온종일 봄 속을 뛰어다니던 기억, 나의 정서는 그 시절에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봄이 왔다.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이 지났으니 점점 더 많은 자연이 봄기운에 기대 일어날 것이다. 이미 아랫녘 남도에는 꽃소식이 한창이다. 아마도 며칠 후면 남도에서 시작된 꽃 소식이 바람을 타고 이곳까지 화사하게 물들일 것이다. 노란 개나리가 그 첫 시작이 될 터이고 다음으로 목련이 피고 뒤를 이어 벚꽃이 만개할 것이다. 봄의 완성은 뭐니 뭐니해도 꽃이 아니던가.
근무하는 유치원에도 꽃처럼 눈부시고 화사한 아이들이 여럿 봄처럼 들어왔다. 다섯 살부터 일곱 살 아이까지 생김도, 표정도 각양각색이다. 아직은 엄마 품이 더 그리운지 아침마다 엄마 손을 붙들고 애절한 눈빛으로 울먹이는 아이, 개나리처럼 노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햇빛을 가르며 아장아장 걸어오는 귀여운 아이들이 아롱다롱하지만 따뜻한 봄볕을 함께 하며 생활하다 보면 텃밭의 대파처럼 아이들은 하루하루 쑥쑥 자라날 것이다. 손을 잡아주고 눈을 맞추고 말을 걸어 친근함을 표현하다 보면 유치원은 이 사랑스러운 녀석들로 일 년 내내 봄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