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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첫 하루의 시작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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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3.01.03 14:28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다가오는 새해를 푸른 바다에서 맞이하겠다며 지난밤 동해안으로 출발한 지인으로부터 일출 사진이 전송되어왔다. 출렁이는 검푸른 바다 위로 장엄하게 솟아오르는 붉은 해를 간접으로 보고 있자니 함께 내달리지 못한 아쉬움이 가슴 한편으로 훅 밀고 올라온다. 그나마 이 사진 한 장에 뜨거운 기운을 얻었으니 그 힘으로 토끼처럼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계묘년(癸卯年) 한 해의 첫 문을 힘차게 열어본다.

어릴 적 부모님은 밤새 식어버린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며 두런두런 주고받는 담소로 하루를 시작하셨던 것 같다. 아직도 창밖은 어두운 새벽인데 부엌에서 들려오는 두 분의 이야기가 마치 자장가처럼 방문을 타고 이불속을 파고들어 내 귀로 들어오곤 했다. 두 살 터울 오빠가 1등을 해서 기분이 좋다는 얘기, 바로 밑의 동생이 옆집 애랑 싸워 이마에 상처가 났다는 이야기 등…. 잠결에 들려오는 두 분의 정담(情談)을 듣다 보면 어느새 잠은 달아나고 기분 좋게 일어나 나의 하루를 시작했다.

학창 시절에는 새해가 시작되면 늘 열쇠 달린 다이어리를 사 들고 들어와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계획표를 세우곤 했다. 그러나 사회인이 되고 세상사에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다 보니 새해는 그저 새털처럼 많은 날 중의 하루일 뿐이었다. 내가 시간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을 두서없이 쫓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땐 이미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나의 아이는 어느새 키가 큰 성년이 되어 있었고 부모님은 연로하셔서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한 움큼의 약으로 하루를 시작하셨다.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드라마 ‘미생’ 속 나래이션 한 부분이 생각난다. 바둑만을 세상 전부로 생각한 주인공이 프로 입단에 실패하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면서 겪는 희로애락을 현실적으로 잘 그렸다는 평을 얻었던 작품이다.

가장 먼저 출근하는 직장인 그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들어서는 것이 정말 기분 좋다고 했다. ‘내가 문을 연다’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어릴 적 동네 문방구 아저씨는 문을 열면 언제나 수도를 틀어 가게 앞을 청소했다고 하는데 그는 쾌청한 느낌의 그 골목길이 너무 좋았고 그 길을 통과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그 아저씨처럼 그가 문을 열고 하루의 시작을 결정하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며 나래이션은 이어진다.

잔잔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대사였다. 그 장면이 오늘 문득 생각난 것은 늘 건성건성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느꼈던 ‘새해’라는 개념이 어느 날부터인가 의미를 달고 싶은 그런 날로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하루를, 나의 한 해를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생각하게 되고 그 생각이 실행으로 옮겨져서 끝까지 나아간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만 최소한 새해 즈음만이라도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을 옆에 두고 싶은 마음으로 첫 하루의 문을 연다.

엊그제 한 신문사 지면에 실린 사설에서도 울림은 왔다. 미국 역사상 인간의 삶에 대한 최장기 연구 프로젝트인 ‘하버드대 성인 발달 연구’의 네 번째 책임자인 정신과 의사 월딩어 교수는 85년간 쌓아온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토대로 인생에 있어 오직 중요한 한 가지는 ‘사람들과의 따뜻하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라고 했다. 이와 더불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가족과 친구, 이웃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도 했다.

올해는 직장에 휴가를 내서라도 부모님을 모시고 철마다 여행을 다녀야겠다. 꽃이 피면 나들이를 떠나고 푸른 잎에 고운 물이 들면 또 만사를 제치고 길을 나서 보리라. 아이에게 좋은 성적을 내라 닦달하지 않고 앞집에 홀로 살고 계시는 어르신의 하루를 좀 더 세심히 살피리라. 무엇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여서 즐겁고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그런 한해로 첫 시작의 문을 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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