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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달콤한 선물

김일호 한국문인협회 세종시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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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2.02.27 15:22
  • 기자명 By. 충청신문
▲ 김일호 한국문인협회 세종시지회장

솔직히 잠시 동안 망설였다. 늦은 밤 10시쯤이었던 같다. 왕복 4차선 도로이지만 차량 통행이 뜸했던 시간, 횡단보도에 붉은 신호등이 켜졌다. 지켜보는 사람도 없고 지나는 차량도 없으니 신호를 무시하고 건널까 말까 생각하고 있는데 반대편에 초등학교 어린 여학생 둘이 불빛 너머 희미하게 보였다. 어린아이들 보는 앞에서 바쁜 것도 없는 걸음인데 무단 횡단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파랑 신호등이 켜지고 아이들은 건너오고 나는 건너가고 있는데 아이들이 내게로 바짝 다가오더니 “선생님, 신호를 잘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으로 선물을 드릴게요.” 하더니 초코우유 한 팩을 내 손에 쥐여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다. 아마도 그 아이들은 자기들이 먹으려고 사 오던 우유를 내게 주고 간 것 같았다. 우유를 받아 들고 오면서 신호를 무시하고 잠시 건널까 하고 망설였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 미래사회의 희망을 본 듯하여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20대 대통령선거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선수나 응원단이나 한 팀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운동하고 있다. 모든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며 축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과열되다 보면 마타도어나 네거티브가 횡행하게 마련이다. 선의 경쟁을 약속하고 출발했지만,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면 유권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불법과 편법으로 얼룩지기도 하는 것이 우리나라 선거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물론 선거에도 필승을 위한 다양한 전략은 필요하다. 그러나 상대편의 약점만 들춰내거나 인격살인이나 다름없는 흠집 내기의 목소리가 크다 보니 국민이 보고 듣고 판단기준으로 삼아야 할 후보자의 됨됨이나 정책공약은 소란 속에 묻혀 결국 묻지 마 투표로 변질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그것이 마음이든 물질이든 선물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일 많지 않다. 그러나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의 허탈감이나 배신감은 어렵게 쌓아 놓은 신뢰의 탑을 허물게 한다. 세상 길 동행하면서 어떤 약속도 믿기지 않는다면 불안하고 불편한 관계가 되고 말 것이다. 정치도 선거도 마찬가지다. 표를 달라고 온갖 공약을 해놓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지난날을 돌아보면 이번 대통령선거도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불신의 목소리들이 벌써 들려온다. 공약도 국민에게 주겠다는 선물이라면 종잇장에 써놓거나 연단 위에서 외치는 목소리로 끝내서는 안 될 것이다. 달콤한 사탕이라면 입 안에 넣어봐야 그 맛을 알 수 있고, 뜨거운 사랑이라면 품 안에 안겨봐야만 느낄 수 있듯이 정치지도자와 국민 간의 약속도 생활 속 깊이 스며들지 않으면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상호 신뢰는 우리 사회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기본이다. 공정이니 정의니, 상식이니 법질서니 아무리 떠들어 봐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면 헛소리에 불과하다.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는 서로 마주함에 있어 매사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다. 국민이 정부를 믿지 못하고 정치인을 믿지 못한다면 국력의 바탕은 깨질 것이며 봄을 기다리는 국민은 설렘보다는 애타는 마음으로 긴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늦은 밤 신호등의 불빛을 믿고 마냥 횡단보도에 서 있던 그 어린 여학생들이 성장하여 맞이할 미래사회는 믿음의 선물을 아낌없이 주고받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힘도 모자라고 역할도 미약한 촌노(村老)의 생각이다.

지금도 그날 밤 그 아이들이 선물로 주고 간 달콤한 초코우유 맛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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