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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으로] 기억의 저편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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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8.06.11 16:31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혜숙 수필가

남편이 급하게 부른다. 가정의 달이라 연속되는 공연으로 피곤한 터라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무슨 큰일이 난 걸까. 걱정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시골 일에 문외한인 남편은 조그만 일에도 날 불러댄다.

지난 가을 수확한 무를 저장해 두었는데 썩고 있다는 것이다. 빨리 손을 쓰라고 날 부른 것이다. 먹는다고 했는데 양이 많아서인지 먹어도 많이 남아 썩고 있었나 보다. 상한 것은 오려내고 무말랭이를 만들려고 썰어서 말리고 나머진 생채 나물을 만들었다.

무를 정리하는 나를 보고 남편은 아끼다가 똥 됐다고 아까워한다. 사실 나는 무가 그렇게 많이 남았는지 몰랐다. 2년 동안 무씨를 뿌려도 수확이 없더니 작년엔 예상 외로 많은 수확을 했다. 많아도 걱정 모자라도 걱정. 산다는 것은 걱정 속에 사는가 싶다.

썩어서 버리게 된 무를 보고 있자니 어릴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우리 어릴 땐 왜 그렇게 살기 어려웠는지. 군것질 한다는 것은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한번 정도였다. 늦가을 하교 길, 먼 거리를 걸어 집에 오다 보면 시장기가 돌고 힘이 없어진다. 그럴 땐 김장 때 쓰려고 심어 놓은 무 밭이 눈에 띈다. 싱싱한 무를 쑥 뽑아서 잎은 떼어 버리고 무 껍질을 벗겨서 매운 맛이 입안을 얼얼하게 해도 맛나게 먹으며 집으로 갔다.

초등학교 때는 강을 건너야 학교를 갈 수 있었다. 모래사장을 지나 아슬아슬한 통나무다리를 건너서 다녀야 했다. 겨울에 친구들은 모래톱에 고구마를 묻어두었다가 집으로 갈 때 꺼내서 먹는 걸 보고 나도 해 보고 싶었다. 등굣길에 고구마를 모래톱에 묻어두고 표시를 해 두었는데 바람에 표식이 없어져서 고구마를 찾다가 결국 못 찾고 집으로 가야만 했다. 시골에 살면서도 시골 생활에 적응 못한 어설픈 촌뜨기였다.

나는 참 별났던 것 같다. 여름 어느 날 하교 길에 배가 출출했다. 여름이라 밭에서 먹을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학교에서 머지않은 곳에 저수지가 있다, 교복치마를 잔뜩 올리고 저수지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마름이 있기 때문이다. 겉은 검은색에 겉은 뾰족하고 가시 같은 것으로 무장한 것과는 달리 하얀 속살을 품고 있다. 뱀도 많았을 터인데 그때는 겁도 없이 저수지에 들어가 마름을 잔뜩 뽑아서 먹었다. 지금이라면 창피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 깊은 물속에 들어갈 엄두는 내지 않았을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것은 뭐든 먹었던 것 같다. 감나무에 달린 땡감도 따먹고 고구마도 캐 먹었다. 어른들은 우리들이 소행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다들 힘들고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이라 오죽하면 그랬으랴 생각하고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르는 척 한 것이다.
옥수수를 따다가 삶아 먹질 않나 참외고 수박이고 서리를 해 먹고 겨울엔 이웃집 부엌에 가서 밥을 가져다 먹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인정도 있고 어려운 이웃을 헤아리는 마음이 커서였을 것이다, 지금 같으면 경찰서에 신고를 해서 보상하라고 난리라도 쳤을 것이다.

그런 내가 시골에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처음엔 힘이 들어 손발이 붓고 온몸이 물 먹은 솜뭉치 같았는데 십여 년 남짓한 시골생활에 작물도 제법 잘 키운다. 과유불급이라 수확이 많아도 신경 쓰이는 것 같다.

도시에 사는 지인에게 주려면 가져다주거나 택배로 보내야 하는 번거로움에 가까운 지인하고만 나누었는데 남아서 썩어가는 무를 보면서 번거롭다는 생각으로 점점 인색해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

옛날 우리 집은 길가집이라 오며가며 들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쳐서 쉬어가기도 하고 시장해서 들어오기도 했다. 허기져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이 오면 당신이 먹을 밥을 선뜻 내주었던 엄마가 생각난다.

어느 날은 밤늦게 하룻밤 유숙하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고추부대를 들고 사라졌다. 그래도 엄마는 오죽하면 그랬으랴 하고 말았다. 나 혼자만 난리치며 다음부터는 낯선 사람은 재워주지 말라고 화를 냈던 것 같다.

썩은 무를 보면서 인색하지 않게 더 나누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나도 지금 길가 집에 산다. 어떤 이는 이 집에 사는 사람이 궁금하다며 초인종을 누른다. 낯선 사람의 방문에도 싫지 않다. 들어오라고 해서 차 한 잔을 나눈다. 나도 엄마를 닮았나 보다.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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