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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포럼] 숨은 조력자, 페이지터너(page-turner)

박상희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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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8.05.24 16:47
  • 기자명 By. 충청신문
▲ 박상희 피아니스트

보통 연주자들 옆에 의자가 하나 더 놓여있다. 대개는 피아노 옆에 위치해있다. 무대 위에 놓여있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인 의자가 의아하다.

연주가 시작되면 비로소 그 의자의 주인을 알게 된다. 그들은 언제 무대에 입장했는지 모르게 들어왔다가 그림자처럼 사라진다. 마치 소리처럼 연주의 시작과 함께하였다가 공명을 다하면 사라진다.

이들을 우리는 페이지터너(page-turner)라고 한다. 뜻풀이를 하자면 ‘책장을 넘기는 사람’ 쯤 되는데, 일명 넘순이나 넘돌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주 역할은 연주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하여 연주자 대신 악보를 넘겨주는 것이다.

연주자와 관객 모두가 음악에 몰입할 수 있도록 그들은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함께 박수를 받지도 않는다. 무대 위의 가장 조용한 역할이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하다.

악보를 넘기는 행위가 단순해보여도 속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사실상 그날의 무대 성패는 페이지터너가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악보만 읽을 줄 알면 모두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페이지터너의 실수로 악보가 제대로 넘겨지지 않으면, 연주 순서가 뒤바뀌거나 중단되기도 하는 등의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페이지터너는 통상 한 두 번의 리허설로 무대에 오르기 때문에 단 시간에 무대를 파악해야하는 능력을 요구받는다.

또한 연주자들마다 악보를 넘기는 시점의 기호가 다양하여, 그 호흡을 맞춰 줄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를 남기고 넘기기를 원하는 연주자가 있는가하면, 한마디의 반만 남기고 넘기기를 원하는 연주자도 있고, 미리 일어나 악보를 넘길 준비를 하길 원하는 연주자가 있는가 하면, 웬만해서는 재빠르게 넘기고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연주자도 있다.

연주자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한에서만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행동의 절제도 필요하다.

페이지터너에게 요구되는 것이 많은 만큼 전문 페이지터너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다. 페이지터너만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분명 이 분야에서도 전문가는 존재한다.

유명 연주자의 경우, 해당 작품을 연주한 경험이 있는 피아니스트를 섭외하기도 한다. 보통의 경우에는 후배나 제자들이 맡아서 하게 되는데, 페이지터너로서 처음 무대에 서는 경우에는 연주자보다도 더 긴장을 하는 경우가 있어 해프닝이 많이 일어난다. 악보 두 장을 한꺼번에 넘기거나, 반복 되는 구간을 놓쳐 진행이 멈추기도 한다. 리허설을 하고, 설명을 반복했어도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쩔 수가 없다.

그들의 부담감을 알기에 부탁하기가 어려운데, 선뜻 제안을 받아들여주면 무척이나 고맙다. 악보를 보고 연주해야하는 무대 위에서의 예민함은 암보로 연주할 때와는 또 다른 고충이 있는데, 페이지터너를 통해서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에는 페이지터너 덕에 연주의 긴장을 풀기도 한다. 악보가 뒤바뀌었을 때에 신속히 대처를 해준다든가, 마치 듀오를 연주하듯이 악보를 함께 읽어가며 너무나 편안하게 악보를 넘겨주는 이에게서는 고맙다는 말이 연신 나올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그날의 연주를 가능하게 해 준 사람이라서 더더욱 감사한 마음이 든다.

독주나 협연이 아닌 이상 악보를 보게 되는 연주가 많다. 그때마다 악보를 축소하고 편집하거나, 이어붙이기도 하는 등 많은 애를 써본다. 전자 악보나 태블릿을 이용해서라도 해결을 해보려고 많이 시도해본다.

하지만 단순한 악보 넘기기가 아니라 함께 호흡을 해야 하는 일이기에, 그래도 결국에는 페이지 터너를 찾게 된다.

모든 일이 그렇듯 한 가지 일을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힘이 모아져야 한다. 소리를 내고 있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함께 연주하는 숨은 조력자, 그들이 있어 무대가 완성된다.

박상희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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