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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으로] 걸어서 제주 속으로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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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8.04.23 16:29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혜숙 수필가

남편이 집에 온 뒤부터 올레 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등산을 좋아하고 걷는 것에 자신 있어 하는 사람이다. 몇 년 전에 혼자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더 바빠지기 전에 길을 나섰다. 일을 잠시 쉬면서 휴식시간을 갖겠다는 조카딸도 고모와 함께 하겠다며 서울서 제주로 내려왔다.

18코스부터 걷기로 했다. 평소에 8㎞ 정도 걸었으니 무사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조카딸의 재잘거림과 아름다운 풍광, 걷기에 적당히 흐린 날씨. 가는 곳마다 야생화가 하늘거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유채꽃이 노란 머리를 흔들며 반갑게 웃는다. 눈부시듯 파란 하늘과 맑고 깨끗한 바닷물이 세속에 찌든 마음을 정화해주는 것 같다.

제주에 있는 아들이 출발점까지 데려다 주었다. 사업이 바쁜 아들이 힘들지 않게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를 어디서 탈지 몰라 기사에게 물어보면 안 간다는 단답형 대답이다. 노선이 다르면 다른 방향에서 타라고 해야 하는데, 불친절한 기사 덕분에 제주도의 반을 돌아야 했다.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왜 불친절한 걸까. 상점에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사고 싶으면 사고 싫으면 말라는 식이다. 조카딸도 무심한 듯 대하는 그들의 행동에 불평을 한다. 모든 도민이 그렇지는 않겠지. 우리의 일진이 나쁜 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제주 사람들이 배타적이라고 한다. 처음엔 같은 나라 사람인데 왜 그럴까 생각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다녀가는데 그땐 유명한 곳만 다니다 보니 이들의 특성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함덕 해수욕장을 지나 서우봉을 넘어 19코스가 지나는 북촌마을로 갔다. 북촌마을에 지나는데 작은 돌탑이 보였다. 돌탑 사이사이에 인형과 꽃, 사탕과 과자, 과일들이 돌 틈에 놓여있다. 멀리서 보니 너무 예뻐서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가는 순간 가슴이 먹먹한 게 목울대가 떨린다. 애기 무덤이란다. 북촌리 주민 학살 때 어른들의 시신은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다른 곳에 안장됐는데 어린아이 시신은 임시 매장한 상태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있단다.

4·3 사건이 일어난 후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내가 이 사건에 대해 안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그렇게 많은 주민이 죽었는데도 대부분의 국민들도 그 이유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상과 이념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와 여인, 순수한 주민들이 살해 당한 아주 끔찍한 사건이 이 곳에서 있었다. 죽지 못해 살던 삶이고 상처투성이인 마음으로 누구를 배려할 수 있을까. 발로 여행하면서 아주 조금 이곳에 대해 알게 된 것 같다.

4·3 기념관이 생기고 70주년이 되는 올해는 대통령까지 참석해서 제대로 된 기념식을 했다. 그걸로 살해된 영혼들이 위로가 될까마는 작은 위안이라도 되길 바라본다.

올레길을 걷던 중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몇몇 아이들이 4·3 사건 제대로 알기란 책과 조화로 만든 동백꽃 준다. 동백꽃은 4·3 사건의 영혼들이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없이 스러져갔다는 의미를 내포한단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속히 모든 것이 해결돼서 피해자나 그 유족들의 가슴에 한이 풀리길 기도해본다.

우리나라 근대 역사는 아픔의 연속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강대국들의 땅따먹기 식의 분단, 동족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되는 아픔. 그 와중에 일어난 것이 4·3 사건이다.

70년 세월동안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온 유족들. 이념이 무엇인지 사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 생명들까지 무참히 앗아간 아픈 역사의 현장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 늦었지만 온 국민이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가.

어느 시골의 한적한 바닷가 마을을 지나갈 때다. 노부부는 금귤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를 자르더니 남편과 나한테 한 가지씩 건네준다. 나그네에게 정을 주는 노부부를 보며 지나가는 길손에게도 물 한 그릇을 내어주던 옛 어른들의 정겨움이 생각났다. 제주의 일부만 보고 다 본 것처럼 생각하고 원망하던 분별심을 내려놓는다.

일곱 코스를 걷는 동안 제주를 느끼며 같이 아파하고 안타까워한 것 같다. 아름다운 경치 만큼이나 아픔이 많은 곳. 곳곳에 깊은 상처들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많은 사람들을 제주로 불러오는 것은 아닐까. 남은 코스를 완주하는 날은 아마도 제주에 푹 빠질 것 같다.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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