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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벚꽃, 그 여자

강희진 (음성예총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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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8.04.16 23:29
  • 기자명 By. 충청신문
벚꽃이 눈처럼 날린다. 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순백의 벚꽃이 거리를 점령했다. 오늘 이 아름다운 거리를 일부러 몇 번이나 왕복했는지 모른다.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니 이유 없이 슬프다. 영원하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인지, 꽃 그 자체가 주는 처연함인지 잘 모르겠지만 오늘 벚꽃은 마냥 슬픈 정서이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후배가 제주도로 갔다며 연락을 해 왔다. 한때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연락을 하고 시간만 나면 만나서 수다를 떨었다. 그녀의 가족사부터 시작해 연애사까지 속속 모르는 것이 없는 사이였다. 결혼을 하고 그녀의 연락은 뜸해졌고 나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정신없던 때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연락이 두절되었다. 가끔 들리는 소식으로는 부잣집 딸인 그녀가 어렵게 살아간다는 얘기가 떠돌기는 했지만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 통화로 그녀와 만났다. 인터넷 검색에서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자기는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통화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내 슬픔의 정서가 여기에 맞닿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20대 초반 한 남자를 만났고 집안의 반대가 너무 심해 후배는 가출을 감행했고 아이를 낳았다. 후배를 찾으러 그녀의 어머니와 학교 앞 자취방을 뒤졌던 일이 어제 일인듯 생생하다. 우여곡절 끝에 입었던 그녀의 웨딩드레스는 그래서 더욱 아름다웠다.

그 후배의 사랑은 내게 있어 전설이었다. 누가 사랑이라 말하면 나는 늘 사랑은 그들처럼 해야 한다고 후배의 러브스토리로 열변을 토하고는 했다. 그런데 오늘 그 전설이 무너졌다. 결혼하고부터 의처증이 시작되었고 아이가 3살쯤 되던 해부터 폭력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도망까지 하면서 선택한 사랑이라 부모님에게도 말을 못했고 아는 사람 만날까 두려워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살았다고 했다. 딸아이가 외국인을 만나 호주로 떠나고 나서 지긋지긋한 사랑을 정리하고 제주도로 들어왔다고 했다.

생활을 걱정하는 나에게 오래전부터 간병인으로 일을 한 덕분에 제주도에 가서도 요양보호사 일자리를 구해 혼자 먹고 사는 것은 지장이 없다며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은 쉬는 날이면 혼자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면서 지나온 삶을 정리하고 있노라고도 했다.

가장 아름다운 올레 5코스를 같이 걷자면서 언재든지 환영한다고 꼭 오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바다 건너라는 물리적인 거리도 그녀가 제주도에 있다고 하니 한결 가까워 보였다. 요즘 들어 세상의 가장 헛된 명성과 명예를 좇아 숨차게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것저것 책임을 맡아 놓고 제대로 하지 못한 듯 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참이라 더욱 일상을 탈출하고 싶었다.

후배의 제주도 삶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60이 넘으면 제주도로 가서 살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받게 될 연금과 저축액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계산하고 내 예상 수명과 대비해 노후 자금이 얼마나 필요한지 궁금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봤더니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 자료가 있었다. 60대 이후 노후 생활비, 기본적인 생활비로 46.6%가 월 200~300만원은 돼야 한다고 답했다. 제주도의 환상에서 빠져나왔다. 현실은 ‘지금 여기에’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래도 눈부신 젊은 날 한때를 함께 했던 후배가 제주도에 살고 있다고 하니 아름다운 올레길 5코스를 곧 걸으러 가야겠다.

벚꽃, 그 여자 / 젖은 머리로 셔터를 누른다 / 옷자락에 벚꽃이 착상된다
움직일 때마다 / 꽃잎이 춤을 춘다 / 저 여자 / 마음에 풍랑이 일겠다
더딘 하루가 가겠다/ 꽃이 질 때까지 / 마음에 렌즈를 닫을 때까지
저 여자 봄 바람에 / 맥 못 추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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