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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포럼] 연필

박상희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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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8.03.01 15:53
  • 기자명 By. 충청신문
▲ 박상희 피아니스트

나는 연필을 매우 좋아한다. 연필이 종이와 마찰하며 내는 소리도 좋아하고, 그 소리가 지나간 흔적을 바라보는 것도 매우 좋아한다. 여느 연필 마니아들처럼 나무의 연질을 논하거나 흑심의 향기까지 맡아보는 경지에 이르진 못했지만, 어찌 됐든 연필이 주는 느낌을 매우 좋아한다. 언제든지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는 여지가 주는 열린 미래가 있다.

연필에 대한 추억은 아주 오래전 경필 쓰기 대회가 시작이겠다. 지금이야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바로 글자를 읽기 시작하지만, 예전에는 쓰는 활동이 많았다. 그래서 과거에는 글씨를 무수히 써 댔었다. 교과서에 있는 글자들을 또박또박 써 내려가고, 그것도 다 마치면 일반 종이와는 다른 느낌의 불투명한 마분지(지금은 '트레이싱지'라고 하나보다.)를 위에 덧대어 또 한 번 따라 써 내려갔다.

종이에 쓸 때와는 다르게 마분지 위에서의 연필은 촉감이 색달랐다. 어떤 연필은 흑심이 너무 묽어서 힘 조절을 잘못하면 마분지 위에서 미끄러지기도 했고, 어떤 연필은 획을 긋기도 전에 종이를 찢어내는 연필도 있었다. 나무의 결이 고른 연필도 있었던가 하면, 깎으면 매끄럽지 못하게 가시를 세우는 연필도 있었다. 바르게 쓰는 것에 웬 그리 집착을 했었는지 그때부터 연필에 대한 호불호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좋은 연필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작품을 공부할 때도 나는 연필을 쓴다. 악보에 그려질 연필은 매우 중요하다. 프레이즈나 아티큘레이션을 표시할 때, 종이를 긁지 않는 묽기와 부드러운 마찰로서 내 소중한 악보에 그려지기를 바란다. 단순한 표기가 아니라, 생각을 따라 움직여줘야 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더욱이 연필이 중요해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아이디어를 능동적으로 반영해 줄 수 있는 것도 연필이다. 언제든지 지우개로 지우면 수정이 가능한 편리성도 있다.

요즘은 시대가 변하여 연필로 필기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휴대할 수 있는 연필깎이나 칼이 있다 해도, 그것의 모양을 잡아내는 순간의 시간조차 참을 수 없어 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이니까. 펜이나 샤프 연필 등 다른 필기도구도 많이 사용하지만, 오히려 그것들은 메모나 낙서를 위한 것으로, 식사로 치면 패스트푸드처럼 이용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거나 간단한 대체용품으로서의 기능. 정말 중요한 적을 거리에는 연필을 들게 된다.

독일에서 유학 중에 정말 괜찮은 연필을 만났다. S사의 N연필. B심은 악보 위를 활보하기에 아주 좋다.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것이 동시에 느껴지는데, 흑심이 힘의 강약에 따라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고르게 반응한다. 육각으로 잡힌 바디가 손안에 안착하는 느낌은 매우 안정적이다. 어느 각도로도 편안하게 쓸 수 있다. 외양의 진노랑, 검정의 색깔 조합도 매우 마음에 든다. S사의 의 M연필이 제도용으로 더 유명할지도 모르지만, 필기는 단연 N만한 게 없다.

사람도 물건도 한 번 마음에 들면 쉽사리 바꾸지를 못하는 편인데, 그때 만난 연필을 굳이 국내에서도 찾느라 꽤 애를 먹었었다. 그 연필이 다 동이 날 무렵, 파는 곳을 찾지 못해 여러 문구류 코너를 돌아다녔는데, 동행인은 그런 나를 기묘하게 봤다. 요즘 세상에 연필 쓰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화가나 만화가가 아닌 이상 그렇게까지 연필을 고르는 사람을 없었을 테니까. 별난 취향의 이해를 받기란 원래 어려운 법. 이 글을 보고 미소 짓고 있다면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깍기의 정석’이라는 책을 추천한다.

내 피아노 앞에는 어김없이 그 연필이 놓여있다. 연필을 보면 묘하게 안심이 된다. 공부하기 전에 학생들이 책상 정리를 하는 것처럼 난 연필부터 깎고 연습을 시작한다. 펜으로 악보 위에 메모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순간을 확신할 수 있는지 부럽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하다.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취향을 고수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진부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것에 민감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것이 주는 향수 혹은 안정감은 아마 클래식 음악이 주는 느낌과도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박상희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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