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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포럼] 암보(暗譜), 악보를 외워 기억함

박상희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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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09.28 16:15
  • 기자명 By. 충청신문
▲ 박상희 피아니스트

당신이 기억할 수 있는 최대치는 어디까지인가. 요즘처럼 쉽게 검색하고 저장이 가능한 시대에는 기억하는 행위 자체가 불필요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전화번호 네댓 개쯤은 반사적으로 외우는 것이 가능했으나 요즘은 이름을 외우는 것도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지금 세상은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무대에 선 연주자들은 여전히 악보 없이 연주하는 관행을 따르고 있다. 장 시간, 긴 프로그램을 악보 없이 연주 해내는 것을 보며 연주력은 둘째치고 관객들은 일단 그것부터 감탄한다. 암보로 연주하는 것, 그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클라라 슈만이 악보 없이 무대에 등장하여 관객들을 기함시켰던 1828년 그 전에는, 연주자가 악보를 가지고 등장하는 것이 당연한 행동이었다. 오히려 악보 없이 연주하는 것은 자기 과시용이며,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예전의 보면대를 살펴보면 매우 화려하고 장식적인 공을 들인 것들이 눈에 띈다. 악보와 보면대도 연주의 오브제 중 하나였던 것이다. 오늘 날에는 독주 형태의 곡을 연주할 때에는 연주자들이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하는 경우가 많고, 실내악이나 합창곡, 오케스트라 단원들, 오페라 가수 등은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연주자들은 무대를 준비하면서 기본적으로는 모든 곡을 다양한 방법으로 암기를 하고 있다. 암보 없이는 악보를 본다 해도 연주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보를 놓고 연주한다고 하여 연주자가 마냥 눈으로 악보를 쫓고 있지는 않다. 템포에 맞춰 악보에 있는 요소들을 다 표현해 내야하는데, 글자를 읽듯이 악보만 보고 있다면 제대로 연주하기란 불가능이다.

도약이 심한 곡이나, 빠른 패시지, 넓은 음역대를 사용하는 곡의 경우 두 손과 악보를 가시거리에 놓기는 불가능하여 암보가 없이는 연주가 위험할 정도이다. 사실상 악보를 놓고 연주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연주의 질에 대해서 크게 좌우될 것은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과 암보로 연주하는 것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심리적인 요인과 몰입도가 가장 클 것인데, 악보를 보고 연주하게 되면 연주자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는 암기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어서 매우 예민한 연주자의 경우에는 이런 선택을 하기도 한다.

반대로 악보가 없이 암보로 연주하게 되면 연주자는 몰입도가 높아지며 음악적 효과에 더 치중할 수 있게 된다. 오로지 기억에 의존하며 시작과 끝을 풀어내야하기 때문에 보통의 정신 훈련으로 될 일이 아니다. 연주를 준비하면서 실제로 가장 부담을 느끼는 부분이 최종적인 암보에 있는데, 연주자들은 연주회 전에 무대에 올라가 악보를 새하얗게 잊어버려 연주가 중단되거나 하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암보라는 것은 단순히 악보를 숫자 외듯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입체적으로 구조와 색채 그리고 질감까지도 표현해 내는 고도의 작업이다. 그 모든 것이 사진 혹은 영상처럼 뇌리에 주입하여 신체의 움직임과 함께 쏟아져 나오도록 하는 것이 암보 연주의 효과인데, 이때 연주에의 몰입도는 배가 된다.

하지만 제 아무리 준비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인간의 기억력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통제 불가의 변수에 대항할 수는 없다. 연주회장에서 관객들에게 휴대폰 전원을 끄거나 작은 소음도 자제해달라는 에티켓을 요구하는 이유가 설명이 될는지 모르겠다. 연주의 흐름이 매끄러우면 연주자와 관객 모두의 만족을 높이는 일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예전에는 연습 몇 번 만에 악보가 외워지던 시절이 있었다. 상당히 많은 작품들을 동시에 연습했고, 암보의 압박도 적었다. 확실히 어린 시절에 레퍼토리를 많이 확보해 놓는 것이 중요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암보가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작품을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들었던 예전에 비해 지금은 그 시간이 줄었지만 반대로 암보를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한다. 비교적 작품 길이가 긴 피아니스트들에게 유독 암보 연주가 더 당연하게 요구되어 연주를 준비하는데 상당한 중압감을 느낀다. 때문에 비교적 짧은 작품 길이를 주로 실연하는 연주자에 비해 연주 횟수에도 제한을 가져온다.

많은 연주자들은 암보 연주가 꼭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암보에 할애되는 시간만큼을 더 음악적인 연구에, 그리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익히는데 쓰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헝가리 출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바르톡, 피아니스트 피터 제르킨, 말년의 리히터도 모두 악보를 놓고 연주했다. 최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를 마친 피아니스트 백건우도 모든 곡을 악보를 보고 연주했다. 암보 연주가 연주자의 기량 혹은 준비의 척도에 직결되어 볼 일은 분명 아니다. 연주자로서 음악의 본질 전달에 충실하다면 암보의 관행에서는 좀 더 자유로워져도 되지 않을까 싶다.

박상희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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