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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으로] 평행선

한기연 시인. 평생교육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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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06.12 15:57
  • 기자명 By. 충청신문
▲ 한기연 시인. 평생교육강사
[충청신문=한기연 시인. 평생교육강사] 늦은 저녁 지친 몸을 소파에 던지고 아무 생각 없이 두 눈을 감고 있는데 문자 전송음이 울렸다. 카톡으로 전송된 사진 한 장을 보는 순간 피로가 사라졌다. 스무 해 넘게 모임을 함께 해 온 언니가 보내온 사진에서 11년 전 서른 살 후반의 젊은 내 모습과 마주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편린들이 모여졌다. 문우들과 초등학교 4학년이던 큰아들과 함께 했던 첫 여행지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에서의 순간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금까지 10여 개국을 여행했지만 처음의 감동과 경이로움을 아직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다.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던 중 받은 뜻밖의 선물에 잠시나마 행복했다.
 
요즘은 가끔 옛 추억을 떠올릴 때가 많아졌다. 젊은 날에는 없는 살림에 두 아들 키우고 동동거리며 앞만 보고 살아서 외로울 틈이 없었다. 지금도 내 공부하랴 일하랴 바쁘기는 하지만 장성해가는 두 아들의 빈 자리에 외로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 친구들이 들어왔다. 고교시절을 함께 한 다섯 명의 친구와는 스무 살 넘어서부터 모임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노는 걸 좋아하거나 술을 즐기는 친구들이 아니라서 두 달에 한 번 만나 밥 먹고 수다 떠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가까이 있는 몇 명은 가끔 저녁에 술자리도 하고 여행도 함께 하며 일탈을 했다.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의 모임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개인적 사정으로 불참한 지 몇 년이 되었다. 
 
지난주 토요일에 맛있고 값비싼 한정식집에서 만났는데 또 한 명이 빠진 넷이서 조촐하게 수다를 떨었다. 오늘 오기로 했던 친구와는 전날 만나서 술을 마신 터라 못 온다는 얘기를 대신 전했다. 어제 술을 마신 친구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유안진의 수필집 ‘지란지교를 꿈꾸며’에 나오는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구절을 떠 올리게 하는 친구이다. 내가 힘들거나 지쳐 다른 사람의 흉을 보더라도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쳐 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으면 된다’는 책의 구절에 걸맞은 ‘지란지교(芝蘭之交)’의 사이로 지냈다. 
 
그늘져 보이는 친구의 얼굴이 걱정돼서 함께 한 술자리였는데 성급하게 내 얘기를 먼저 늘어놓는다. 속 깊은 친구는 마주 앉아 나의 푸념을 다 듣고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 친구가 느끼는 고통과 고독이 내게도 전해지지만 쉽게 이야기를 풀지 못하고 술만 연거푸 들이켠다. 술의 힘을 빌려 이야기를 꺼낸다. 아픔을 겪으며 모임에 나오지 못하는 오랜 친구 이야기를 하고 학창 시절의 소소한 사건을 함께 공유한다. 그러면서 친구는 우리 친구들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사이 같다는 말을 한다. 같은 평면 위를 달리고 있는 두 개의 직선은 서로 부딪치지 않고 나란히 곧게 뻗어 있다. 어찌 보면 싸움도 일어나지 않고 평온한 상태라고 할 수 있으나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충돌로 인한 마찰도 거의 없이 30년 지기 친구로 지냈다. 요즘 들어 술 한 잔을 핑계로 흐트러진 모습을 서로 보여 주기는 했으나 치고받고 싸우기라도 했으면 인연을 끊거나 아님 더 깊어질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던진 ‘평행선’이라는 단어가 계속 뇌리를 맴돈다. 더 이상 감출 것 없는 나이에 외로움을 함께 견디며 오랜 우정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나를 드러내고 서로를 응원해 주는 지혜가 필요할 때인 것 같다. 오랫동안 함께 하지 못했던 친구가 그립고 보고 싶다. 평행으로 달리다가 어느 한 쪽이 기울면 만날 날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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