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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는 이야기] 날씨로 본 삶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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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02.14 16:24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정희 시인, 둥그레동인회장

날씨가 풀렸다. 2월도 중순이라 그런지 어느 새 봄볕 특유의 따스한 기가 느껴진다. 개울을 지날 때도 과히 춥지가 않다. 청미천 기슭의 물오리도 숫자가 훨씬 줄었다. 사흘 전만 해도 무척이나 추웠고 예의 물오리가 떼로 모여들더니 지금은 몇 마리 남아 있을 뿐 조용하다. 춥기만 하면 시끌벅적 모여 들던 물오리, 그나마 따스해질 때는 대부분 물가를 떠나곤 했으니 배경이 궁금하다.

늦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그 날 청미천 다리께를 지나는데 바람이 어찌나 차가운지 몰랐다. 그야말로 쌩쌩 귀 끝이 아리도록 불어대는 바람. 잔뜩 웅크린 채 동동거리며 가는데 저만치 물오리가 까맣게 모여들었다. 어림잡아 서른 마리는 될까, 그 많은 녀석들이 약속이나 한 듯 기슭에 불시착했다. 얼음은 희다 못해 푸른 기氣까지 돌고 자맥질이나 하듯 그 틈을 오가고 있으니 보기만 해도 오싹한 느낌인데 녀석들은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게 전혀 춥지 않아 보였다. 저만치 갈대밭에도 여남은 마리가 모여, 무슨 정담이라도 나누는 것처럼 조용하다. 이 추운 겨울 날 하필이면 얼음이 잔뜩 언 개울에 앉아 있으니 추위쯤은 안중에도 없는 대단한 녀석들이다.

하기야 그들이 떠나 왔을 시베리아 등지에 비하면 여기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일까. 어쩌면 지금 여기 날씨는 그들이 사는 고장의 가을에 해당될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막상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추워서 오싹했던 잠시 전의 기분이 새롭다. 가령 낙엽이 날릴 즈음이면 여름 철새인 제비는 벌써 강남으로 갈 준비를 한다. 늦가을 어느 때 빨랫줄에 보면 작별 인사나 하듯 떼 지어 지저귀던 풍경이 잡힐 듯 선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따스한 곳만 찾아다니는 제비로서는 지금 저 별나게 추운 날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개울에서 천렵이나 하듯 소일하는 물오리 세계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똑같이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철새들의 생태는 그렇게 대조적이었다. 가령 물오리 같은 경우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강추위 속에서 단련되다 보니 지금 날씨는 쌀쌀한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그나마도 거기서의 한겨울은 강심장인 녀석들에게도 너무 추워 견디지 못하고 남하한 것이지만 우리보다는 역시 추위에 이골이 난 녀석이라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지난 초겨울 부산의 친구가 놀러 왔었다. 와서는 시베리아에 온 것 같다며 얼마나 추워하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는 겨울이라 해도 영하 3℃ 안팎이었다. 그래 뭐 이까짓 추위를 갖고 그러느냐고 하자 부산은 아직 영하로 떨어진 적이 없다고 하니 차가운 물속에서 헤엄치던 물오리가 저희들 자맥질하는 걸 보고 얼결에 몸서리치던 나를 보면 그런 기분이었을까. 말은 부산 친구라고 했지만 고향은 천안이었던 만큼 어릴 때는 문제도 되지 않았을 텐데 몇 십 년 부산에 눌러 살다 보니 내성이 떨어졌나 보다.

물오리도 여기 내처 눌러 살면 그러다가 언제 한 번 고향에 돌아가면 지금 내 친구마냥 무지하게 추운 날씨라고 혀를 차게 되지 않을까. 그나마도 봄에는 다시 고향에 갔다가 진짜 겨울이 되어 더는 살 수 없이 추워질 때 내려오고 그렇게 날씨의 탄력성에 길들여질 동안 내가 본, 차가운 물속에서의 자맥질이 가능했을 것으로 본다. 우리는 너무 추워 쩔쩔매는데 물오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테니 추위니 더위니 하는 것도 기실은 상대적이다. 영하 3℃ 안팎의 날씨를 시베리아에 온 것 같다면서 옹송거리던 친구를 보고 나 자신 잠깐 실소했던 것처럼.

그것은 여름철새인 제비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 찾아오는 건 봄이되 너무 더워서 떠나왔을 테고 물오리는 따스한 곳을 찾아 온 것이었으나 적응하기 좋은 날씨를 찾아 고향을 떠난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부산의 친구는 나보다 더 약해서 시베리아를 들먹이며 동동거렸으니 물오리의 한겨울 해프닝을 보면 날씨 또한 견디기 나름이고 시련 역시 더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고 보면 간단한 문제로 바뀔 수 있다. 물오리가, 저희 나라에서는 견디지 못하고 피해 왔을지언정 상상도 못할 추위를 견뎌온 이력 때문에 냇가에서의 자맥질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나 또한 늘 춥다고 옹송거렸지만 친구보다는 내성이 강할 수도 있는 것처럼.

다시금 물오리를 바라본다. 며칠 전에는 그리 춥더니 지금은 보석마냥 쏟아지는 햇살이 정겹기만 하다. 앞으로도 추위는 몇 번 있겠지만 뜻밖의 의미를 체득한 며칠 전의 기억을 되살려 보는 기분이 자못 새롭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것, 지금 여건은 좋지 않으나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바라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걸 숙지해 본다.주변의 인물을 누군가와 견주고 비교하는 것은 자칫 스트레스가 될 수 있으나 때로 뜻밖의 처방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나보다 못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에 대한 우월감을 갖기보다는 힘들 때마다 슬기롭게 극복하는 과정으로 삼는 것이다. 볼품없이 새까만 물오리를 보면서 배운 삶의 한 덕목이었다.

이정희 시인, 둥그레동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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