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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참담하고 부끄럽습니다

안순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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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6.11.03 15:34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안 순 택 논설실장
[충청신문=안순택 논설실장] 집으로 가는 버스가 도중에 멈춰섭니다. 늘어선 차량들 옆으로 가두행렬이 길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최순실”하고 선창을 하면 “구속하라”하고 외치고, “새누리당”하면 “해체하라”, “박근혜”하면 “하야하라”하고 외칩니다. 촛불을 손에 든 행렬에 청년들과 넥타이를 맨 회사원들이 보이고 노인들, 중·고등 학생들도 보입니다.
 
그 많은 시민들이 창피하고 부끄럽고, 이런 나라에서 사는 게 자존심 상해 못 견디겠다고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대통령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게 나라냐”라는 한탄과 “나라 꼬라지가 이게 뭐냐”는 허탈감이 시민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참담합니다. ‘참담하다’는 형용사는 ‘끔찍하고 절망적이다’는 뜻입니다. ‘몹시 슬프고 괴롭다’는 뜻도 있습니다. 지금은 이 모두입니다. 끔찍하고 슬프고 괴롭습니다.
 
연륜이 일천하다고는 해도, 명색이 민주주의인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런 ‘원시적’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지,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대통령의 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겁습니다. 대통령의 말은 구체적인 정책으로 실현되거나 정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지요. 대통령의 말에는 대통령의 국정철학, 주요 국정과제에 대한 방향 및 평가가 담깁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말이 나오면 지방신문의 데스크는 그 말이 과연 지방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따지고 분석합니다.
 
그 대통령의 말을 최순실이 고쳤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름 열심히 분석하고 보도해온 대통령의 말은 대체 누구의 것입니까. 이를 보도해 온 기자로서 참담한 심정입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참모들과 각료들의 제안과 조언에 귀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박 대통령처럼 소통이 안 되는 지도자는 일찍이 없었다는 국민적 불만이 비등했지만 “워낙 고집이 센 사람이라 누구 말도 듣지 않는다”는 체념으로 마무리 지어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참모나 각료는 지시의 대상이지 협의의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정국 운영의 큰 그림을 그려주고, 정책의 가닥을 잡아주는 누군가, 혹 주변인물은 누구인지 늘 궁금했습니다. 그게 누군지,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건 대통령의 일탈을 방조하고 아무런 견제를 하지 못한 청와대 참모나 각료, 집권당의 책임이 큽니다. 이들은 정말 몰랐을까요. ‘감시견’ 역할을 해야 할 언론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박 대통령이 비대위원장인 시절, ‘형광등 100개를 켜 놓은 듯한 아우라’라고 한 건 누굽니까. ‘인간 박정희’ ‘강철왕’을 제작하겠다며, 눈물겹게 ‘박비어천가’를 쏟아낸 건 누굽니까.
 
그런 언론이 하루아침에 태도가 돌변해 현 정권에 직격탄을 마구 쏘아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정신 못 차렸습니다. 최순실이 검찰에 출석하던 날, 포토라인은 일찌감치 국내외 취재진들로 장사진을 이뤘습니다. 까만 벙거지와 물방울무늬 스카프, 검은색 스리버튼 코트 차림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최순실이 나타나자 시민단체와 취재진이 한꺼번에 몰려들었고, 그 바람에 서로 엉키고 치이고 넘어지면서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 소란 중에 최 씨의 신발 한 쪽이 벗겨졌는데, 용케도 카메라가 그 검은색 단화의 바닥에서 명품 브랜드 로고를 찾아내 “심봤다”를 외친 겁니다. 이어 “작년 봄·여름 제품으로 당시 매장 판매가격은 72만원이었고 현재는 단종됐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입니다. 본질은 그게 아닌데,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 가히 ‘역대급’ 사건에서조차 언론은 선정성을 버리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습니다. 참담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겠습니다.
 
대통령이 지지율은 한 자릿수로 추락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뇌사상태입니다. 대통령의 위기는 정권 위기를 넘어 국가 위기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이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눈치입니다. 정치권과 협의도 없이 국무총리를 임명합니다. 이 와중에도 어떻게든 국정주도권을 유지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지금의 현실을 대통령에게 있는 그대로 전해줄 사람 누구 없습니까. 위기를 넘길 방안을 대통령에게 들려줄 사람 어디 없습니까. 지금의 위기를 넘길 방안을 대통령도 최순실에게 묻지 말고 국민에게 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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