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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합리적 의심

안순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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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6.10.20 16:00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안 순 택 논설실장
[충청신문=안순택 논설실장] 책상 가득 가을 풍광을 담은 사진이 놓여 있습니다. 소백산 속리산 계룡산의 단풍, 가로수 감나무에 누런 감이 주렁주렁 달린 영동 시가지, 오서산의 은빛 억새 등등 가을 정취가 물씬물씬합니다. 이런 날은 마음이 싱숭생숭, 도무지 앉아 있기가 어렵습니다.
 
“저기 가는 저 길손 말 좀 물어보세. 한로철 풍악(楓嶽. 가을 금강산) 풍광 곱던가 밉던가. 곱고 밉기 전에 아파서 못 노닐레라. 가지 마오, 가지 마오. 만산홍엽 불이 붙어 살을 데고 오장이 익어 아파서 못 노닐레라.” 옛날 서민들이 노래한 ‘단풍유람’인데, 단풍에 화상을 입는다는 피부감촉적 표현이 참으로 멋집니다. 옛 사람이 말려도, 살이 데는 한이 있더라도 갈 수만 있다면 단풍 보러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울긋불긋한 곳이 계룡산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국회 얘깁니다. 단풍 얘기 하다 뜬금없이 웬 정치 얘기냐 하실지 모르겠는데, 하도 시끄러워 신경이 쓰이는 걸 어쩝니까.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진실을 캐겠다며 야권은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최순실(최서정으로 개명), 차은택 등을 증언대에 세우라하고 여당은 의혹들이 일고의 가치가 없다며 증인채택을 거부합니다. 게다가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사건이 터지자 이번엔 거꾸로 새누리당이 진실을 밝히라 하고, 더 민주당은 ‘색깔론’이라고 받아칩니다. 직접 얼굴을 보진 못하지만 목소리를 내는 의원들 얼굴이 단풍처럼 누르락붉으락 할 거 같습니다.
 
법률 용어 가운데 ‘합리적 의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합리적 의심이란 모든 의문이나 불신이 아니고, 논리와 경험, 건전한 상식으로 보았을 때 가질 수 있는 의문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미르-K스포츠 재단의 경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재벌 대기업에게 800억 원에 가까운 돈을 걷어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세웠다는 건 팩트(사실)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일자리 창출에는 그토록 인색한 대기업들이 어떻게 일사불란하게 800억 원이란 거액을 갹출해 제 것도 아닌 재단을 만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배경에 무언가 대단한 권력의 힘이 작용했을 거라는 의구심이 들고 국민 상당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심은 믿지 못하는 것이고 그래서 왠지 부정적이고 지질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합리적 의심은 불순한 동기를 가진 음모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뢰를 쌓아가는 핵심 요소입니다.
 
우리가 거래를 할 때마다 받은 돈이 위조지폐가 아닐지 의심해야 한다면 사회는 붕괴될 겁니다. 우리가 법과 제도를 만들고 조약과 계약을 하는 건 상대를 믿지 못해서만이 아닙니다. 마치 과학자가 실험 결과를 확인하고 다듬어가듯 신뢰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합리적인 사회는 믿어 달라는 말이 아니라 그걸 뒷받침할 물질적 증거를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합리적 의심에는 합리적 해명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 그러니 합리적 의심조차 “의도가 뭐냐”며 의심부터 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안타깝습니다.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이 불거지자 대통령은 “비상시국에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비방·폭로 행위”라고 합니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유언비어로 처벌할 수 있다”고 엄포까지 놓습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고’, ‘폭로성 발언이나 비방’이라고 하면 세상이 잠잠해질까요.
 
송민순 회고록 논란도 그렇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가물가물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문재인 더 민주당 전 대표는 당사자들과 사실관계를 서로 검증해보고 책임 있는 답변을 내놓아야 합니다. 적어도 합리적 의심을 풀어줄 정도가 돼야 합니다.
 
합리적 의심, 적어도 국민 상당수가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사안을 근거 없는 의혹이라고 일축할수록 국민적 반발은 커지고 의혹은 사실로 굳어집니다. 합리적 의심엔 합리적 해명을 내놓는 게 파문을 최소화하는 길입니다.
 
논란을 떠나 회고록 사건은 구중궁궐 속의 얘기조차도 비밀은 영원히 지켜지지 않는다는 걸 새삼 확인시킵니다.
 
삼국유사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람이 불면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나자 왕은 화가 나 대숲을 모조리 베어내고 산수유를 심게 했습니다. 과연 비밀은 숨겨졌을까요?
 
삼국유사는 뒷이야기도 전합니다. 바람이 불자 산수유 나뭇가지에서 이상한 소리가 또 들렸습니다.
 
“임금님 귀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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