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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스워드 라인’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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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6.06.02 15:26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안 순 택 편집부국장
[충청신문= 안 순 택 편집부국장] 글을 이렇게 시작하려니 씁쓸하다. 대한민국 국민치고 국회가 뭐하는 곳인지 모르는 이가 누가 있는가. 국민을 대표해서, 국회의원들이 나랏일을 논의하는 자리가 국회다. 
 
국회가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다. 법을 만들고 개정하는 일을 한다. 국민을 대신해서 법을 고치거나 없애고, 국민의 생활을 돕거나 정책을 펴나가는데 필요한 법이 무언지 연구한다. 한 해 동안 나라 살림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예산을 결정하고, 그 돈이 어디에 얼마만큼 쓰이는지 심사하는 일을 한다. 이 정도는 초등학교 4학년 정도면 다 안다.
 
대통령이 일은 잘 하는지, 정부가 세금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대통령이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동의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힘이 있으니 국회의원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국회의원 활동 중에 다른 직업을 가져선 안 되고, 부정한 돈을 받아서도 안 되며, 국회의원 지위를 이용해 특권을 행사해도 안 된다. 국민의 대표로서 국민과 국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헌법이 규정한 의무다.
 
품위를 지켜야 하고, 본회의와 위원회에 반드시 출석해야 하며 의사에 관한 법령과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국회법에는 이렇게 돼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새삼 뚱딴지처럼 꺼낸 건 우리 국회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이 기억하는 국회는 고함치고, 삿대질하고, 대들고, 막말하고, 입씨름하는 곳이다. 몸싸움하고 의장석을 점거하는 사진은 국회 선진화법 이후 사라졌지만 사사건건 부딪히고, 부딪쳐 큰 소리가 나고, 큰 소리 끝에 막말이 오가는, 마치 도떼기시장 같은 모습은 여전하다.
 
여야만 싸우는 게 아니다. 같은 당원끼리도 편을 갈라 내편이네, 네편이네 하고 싸운다. 프랑스 의회정치를 비꼬던 ‘의회란 지위를 얻기 위해 양심을 물물교환하는 커다란 시장’이란 말, 딱 그 짝이다.
 
정치는 투쟁이니 몸싸움한다고 마냥 나쁘다고만 할 건 아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요람이라는 영국의회도, 의회 선진국이라는 미국도 한때 주먹다짐이 오갈 정도로 싸웠다.
 
114년전인 1902년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인 벤저민 틸먼은 같은 당 존 맥로린에게 달려가 주먹을 날렸다. 필리핀 지배가 부당하다는 틸먼을 향해 맥로린이 험담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의사당은 아수라장이 됐고, 말리던 의원들도 흠씬 두들겨 맞았다.
 
영국 의회에는 금기어가 있다. 바보, 바리새인, 악당, 위선자, 강아지, 돼지, 반역자 같은 말을 써서는 안 된다. ‘거짓말쟁이’ 라는 단어를 쓰면 결투를 각오해야 한다. 금기어를 사용할 경우 의장으로부터 즉각 취소, 사과, 퇴장명령 등의 제재가 가해진다. 그럼에도 영국 의회에 비난과 야유가 오간다.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한국과 대만, 우크라이나, 호주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무질서한 의회'로 꼽은게 영국이요. 2009년이다.
 
영국 의회 본회의장에는 중앙 연설대를 중심으로 좌우로 여야 의석을 나누는 붉은 선 2개가 그어져 있다. 두 선의 간격은 칼 2개 정도. 여야 의원이 서로 상대방을 향해 칼을 겨눠도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다. 그래서 스워드 라인(Sward Line)이다. 이름은 살벌하지만 무익한 물리적 싸움을 피하고 냉철한 이성과 토론, 대화와 타협으로 의정을 이끌겠다는 지혜의 상징이다. 영국판 불문(不文)의 국회선진화법인 셈이다.
 
국민과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싸워야 한다. 하나, 끝없이 계속되는 무한투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친구는 가까이 둬라, 적은 더 가까이 둬라.’ 적조차도 가까이 두고 대화하란 말이다. 하물며 정치적 상대라면 말해 무엇할까.
 
제20대 국회가 시작됐다. ‘협치’니 뭐니 하기에 달라지나 ‘혹시나’ 했더니, 초장부터 국회의장 자리를 놓고 싸우는 걸 보니 ‘역시나’다. ‘협치’가 한 달도 안 돼 ‘대치’가 되는 꼴이라니.
 
어제는 잊는 게 아니다. 잊히지도 않는다. 어제의 잘못이 있다면 고쳐서 다른 오늘로 화답하는 게 순리다. 국회의 환경은 확 바뀌었다. 여소야대 정국이다. 과거의 방식대로는 어떤 일도 하지 못한다. 의지도 좋고 사명도 좋지만 국민이 호응해야 성공하는 법이다.
 
사람이 우둔한 게 아니다. 욕심이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성심이 모자란 게 아니다. 고집이 앞을 가리기 때문이다. 보는 눈이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20대 국회가 바뀌어야 하는 거. 그것은 눈을 가린 안대부터 벗어던지는 거다. 그리고 국민이 누누이 지적해온 대화와 타협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이게 너무 큰 바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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