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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앙금 빠진 찐빵, 가정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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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6.05.19 15:37
  • 기자명 By. 충청신문
▲ 류 지 일 편집국부국장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5번 출구로 나오면 천도교 수운회관이 있습니다. 건물 왼쪽에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돌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누르지 말자/ 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 사람이 삼십 사십년 앞 사람을 잡아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를 시대를 이끌어갈 ‘새 사람’이라 하고, 어른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야만 새로워질 수 있다는 메시지. 딱 봐도 누가 썼는지 알겠습니다. 어린이의 영원한 친구 소파 방정환(方定煥. 1899~1931) 선생이지요.
 
돌 기념비의 큰 제목이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입니다. 국제사회가 어린이 권리에 대해 처음 관심을 표명한 게 1924년 ‘아동권리에 관한 제네바 선언’입니다. 그런데 방 선생은 그보다 1년을 앞서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이날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올려다)보아 주시오…’로 시작되는 어린이 권리를 담은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이 발표되고, 1000여 명이 거리행진을 하며 선언문을 나눠주었답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또 민간단체가 자생적으로 만들어낸 자랑스러운 기념일, 어린이날은 일제에 의해 중단됐다가 광복 후 5월 5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61년 제정된 아동복지법에 5월 5일로 명시했고, 1970년 공휴일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지요.
 
어린이날로 시작해 8일 어버이날, 16일 성년의 날, 21일 부부의 날로 이어지는 5월은 말 그대로 가정의 달입니다.
 
어버이날은 사순절(四旬節)의 첫날로부터 넷째 일요일까지 어버이의 은혜에 감사하며 교회를 찾는 서양의 풍습이 기원이랍니다. 
 
그러던 것이 미국의 애나 자비스가 1908년 5월 10일 어머니 추도식에 흰 카네이션 470송이를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1924년 우드로 윌슨 미국대통령이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정하면서 기념일이 됐습니다.
 
우리나라는 1956년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정했고, ‘그럼 아버지는 뭐냐’는 남자들의 항의를 달래면서 부모를 향
한 보은을 선양하기 위해 1973년 어버이날로 이름을 바꿉니다.
 
성인의 날은 옛날 나이 스물이면 치르던 관례(冠禮)를 현대화한 날입니다. 사람이 일생동안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사례(四禮)’가 있으니 ‘관혼상제(冠婚喪祭)’요, 이중 관례는 성인이 되었음을 사회가 인정해주는 의식입니다.
 
남자는 상투를 틀어 갓(冠巾)을 씌우고 자(字)를 지어주는 관례로,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주는 계례로,
어른으로서 책임을 일깨우는 ‘책성인지례(責成人之禮)’를 치렀습니다. 5월 셋째 주 월요일은 옛날처럼 거창하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젊은이들에게 성인으로서 자부심과 책임감을 불어넣어 주는 날입니다.
 
‘둘(2)이 하나(1)되어 행복한 가정을 만들자.’ 해서 21일이 부부의 날입니다. ‘부부갈등을 치유하자’며 시작된 일부 종교단체의 운동이 마침내 국가기념일로 승화된 사례입니다. 살을 맞대고 살면서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사는 우리네 부부 사이. 부부 인연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부부가 함께 하는 가정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지 못하는 세태의 반영 같습니다.
 
어린이에, 성년에, 부부에, 어버이까지 5월 가정의 달은 구색을 다 갖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노인을 위한 날이 없습니다. 가정의 숨과 정신은 효와 사랑이요, 그 꼭지점이 노인일진대, 가정의 달에 노인이 없는 건 중요한 뭔가가 빠진 듯합니다.
 
노인의 날이 없는 건 아닙니다. 10월 2일이 노인의 날입니다. 유엔이 정한 국제노인의 날이 10월 1일인데, 우리나라는 이날이 국군의 날과 겹쳐 하루 늦춰 2일이 됐다고 하지요. 하지만 화창한 봄날엔 가정의 달, 쓸쓸한 가을의 노인의 날 묘한 대비가 느껴집니다.
 
얼마 전만 해도 어버이날을 전후한 1주일을 경로주간이라 해서 행사를 가져왔습니다. 이게 어디로 간 걸까요. 세계와 같이 가는 것도 좋지만 우리 것은 우리 것대로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자식이 있는 노인들이야 어버이로서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겠지만 홀로 사는 노인들의 가슴엔 누가 카네이션을 달아 주겠습니까. 가정이 곧 사회요, 사회가 곧 가정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들어 홀로 사는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가 여럿 열리는 걸 보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역시 우리 국민의 의식은 정부를 앞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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