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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87>

6부. 화친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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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6.01.05 16:36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적장 아민도 머리 숙여 추모했다

글/ 남균우

더군다나 이괄의 난 때 후금국에 귀순한 이괄의 참모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향도가 되어 왔고, 이괄의 난 전에 명군의 원군으로 갔던 강홍립도 적이 되어 같이 침공해 왔다. 한윤과 강홍립은 우리나라의 국경 경계 상황을 알고 있는 이들이어서 후금군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묘호란 때 의주부윤 이완은 이순신의 조카로서 임진왜란 때는 공로가 많은 장수이다.

이런 장수가 임진왜란의 실전 경험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의주성을 방어하지 못한 것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괄 군에 소속되었던 군사들 중에는 일본의 항복 군사들도 있었다. 만약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훈련을 잘 시킨 정병 1만 2000 명이 3년 후 정묘호란 때까지 유지되었더라면 후금군이 우리나라 침공을 단념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며 또 병자호란으로 연결이 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한다.

글쓴이는 견문이 좁아 더 널리 살피지 못한 관계로 충장공 남이흥의 역사적 행적을 감히 평가는 못했고 사실 있는 그대로 기술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 글이 앞으로 남이흥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나 전기 집필에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또 이 글이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활약했던 장수들의 행적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는데 시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갖는다.

유감인 것은 정묘호란이 우리나라에 침공해온 후금에게 형제지의의 화친으로 끝난 전쟁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이 전쟁에서 순국한 남이흥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의 전쟁에서 활약한 이들에 비해 현창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끝>

 

‘비장한 순국’오늘로 끝맺습니다

지난해 8월 31일 시작해 매일 연재돼온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이 87회로 끝을 맺습니다. 그간 집필해주신 남균우 선생께 감사드리며 남이흥 장군의 충절과 나라사랑 정신에 성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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