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소설로 쓰는 역사 ]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86>

6부. 화친맹약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16.01.04 19:00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적장 아민도 머리 숙여 추모했다

글/ 남균우

정묘호란은 비록 진 싸움이지만 그래도 단 한 번의 싸움다운 싸움은 안주성 싸움이었다.

네 번이나 격돌했지만 세 번은 저지했고 네 번째 격돌에서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했으니 통탄스런 일이고 그 이후 아군의 다른 싸움은 계속 무인지경으로 굴복하였으니 임금 인조가 치욕과 수모를 받고 굴복까지 하기는 했지만 형제지의를 맺고 끝난 것은 안주성 싸움에서의 적의 타격이 컸기 때문이다.

남이흥이 주장(主將)으로 이끈 안주성의 전투는 졌기 때문에 빛이 나지 않지만 전투에 임했던 남이흥과 휘하 장병들은 3천 명의 군사로 후금군 3만 명과 싸우면서도 비굴하지 않았다. 남이흥은 최후에는 화약고에 블을 지르고 장렬하게 자분하고 최후를 마쳤다.

더구나 남이흥은 이괄의 난 때에 전공을 세워 갈성분위출기호력진무일등공신으로 책봉 받았고 정묘호란 때는 이와 같이 장렬하게 순국을 했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세운 남이흥 등의 공적은 더 큰 전란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가리어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 않은가 생각이 드는데 실제로 우리 역사상 안주성 싸움처럼 비장하고 치열한 싸움이 어디에 또 있었나.

안주성 전투는 우리 역사상 어느 싸움보다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치열했다. 안주성 전투에서 주장(主將)인 남이흥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성이 함락될 때 남강에 투신했던 의병장 삼장사(三壯士)인 김천일, 최경희, 황진과 달리 폭약을 터트려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안주성이 무너지고 난 뒤 무인지경으로 수도인 한양성이 함락되고 강화도에서 인조가 결국에는 형제지의로 화친을 맺었다. 이런 전쟁인 정묘호란 때는 관서지방의 국민 40%가 전사하고 포로로 잡히는 등 극심한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7년 전쟁인 임진왜란 때보다도 더 피해가 컸다는 이야기다.

이 글이 독자들에게 남이흥의 ‘이괄의 난’ 평정과 정묘호란 때의 공적을 알게 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이 글이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의 발생 동기와 결과만을 아는 여러분들에게 전반적인 역사적 사실을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글쓴이의 바람이다.

글쓴이는 이 글을 쓰면서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실리보다 명분을 우선하는 숭명배청(崇明排淸) 정책을 펼친 결과가 얼마나 국가적으로 고통과 손실을 가져왔는가를 정묘호란이라는 전란을 통하여 뼈저리게 느꼈고 깨달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글쓴이는 남이흥의 후손으로서 선조의 공적을 널리 알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역사적 자료를 정리하면서 정묘호란 같은 전란의 발생 원인인 척화(斥和)와 대명의리(大明義理)의 명분주의 이데올로기가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피해를 낳았는가에 가슴이 매우 아팠다.

또 이괄의 난이 정묘호란 때 서북방의 국방을 허술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아쉬웠고 남이흥이 이러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1등공신이라는 혁혁한 공적과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장렬히 순국한 업적이 역사적으로 대단히 크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정묘호란은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남이흥이 순절한 안주성은 우리나라 서북방 방어의 요새지로서 옛날부터 평안병사의 병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평안병사 남이흥이 안주성에 주둔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조정의 권신 이귀의 잘못된 판단에 따라 구성에 주둔하게 하여 아주 짧은 시간에 안주성에 입성하여 방어할 준비를 못한 것이 대단히 안타깝다.

더구나 이괄이 평안병사로서 영변에 주둔하면서 거느린 훈련이 잘된 정병이 1만 2천 명이나 되었는데 그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다 소멸시켰다. 그래서 불과 3년 후 정묘호란 때 후금군에게 침공의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안주성에서의 남이흥이 거느린 병사는 3000여 명에 못 미치었다고 하니 이괄 때에 비해 전력이 얼마나 많이 약화되었는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이 위정자들의 안일한 생각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색당파에서 적대파의 인물이어서 견제와 감시의 대상인물이기 때문에 활동과 운신의 폭이 적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계속>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