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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85>

6부. 화친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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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6.01.03 17:06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적장 아민도 머리 숙여 추모했다

글/ 남균우

그러나 정묘호란은 길게 잡아 7개월이었는데 전쟁의 피해는 더 컸다고 한다. 심지어 평안도와 황해도는 엄청난 피해를 받아서 주민의 40%가 죽거나 도망치거나 이주하거나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후금군의 행패는 그만두고 우방이라고 생각하던 모문룡의 군대도 역시 끊임없는 노략질로 그냥 넘길 수가 없는데 속수무책으로 항의 한 번 못하고 방치했다고 한다. 여름에는 홍수가 나고 전염병이 크게 퍼져 고통을 가중시켰다. 화의를 약속하고 하늘에 맹세한 후에도 후금은 조선을 믿지 못하고 약속을 어기고 전쟁의 행위를 계속했다.

조선은 그런 와중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대명사대(大明事大)에 빠져 속임수로 화친을 맺었다.

정묘호란이 끝난 지 9년 만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후금군은 정묘호란 후 정신을 가다듬어 부국강병을 열심히 했기에 강대국이 되어 병자년(1636년)에 정병을 이끌고 용골대를 총대장으로 조선을 재차 침략하였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인 것이다.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으로 전무후무한 치역을 당했으면서도 갈팡질팡 정신을 못차리고 방황하다가 병자호란을 불러들여 더 지독한 치욕을 당한 것이다. 후금은 강대국이 되어 조선의 재침인 병자호란은 물론 더 나아가 중원을 정복하여 칭제국을 세워 조선의 종주국까지 되었는데 우리 조선은 같은 시간에 무엇을 했기에 이런 참담한 결과를 거듭 당했는지 천추의 한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현재 정국도 이때와 유사하게 북핵으로 인한 위란을 맞고 있는데 긴장을 하지 않고 무사안일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고 느껴지는데 그런 위정자의 모습을 보고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국론을 통일시켜 단호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국민들이 안심하지 않을까? 기대해 보고 싶다. 그러니 병자호란 때와 같은 현실을 보면서 걱정과 근심이 없을 수 없다.

강홍립과 박난영은 후금에 있을 때 새로 장가를 들었는데 그들의 처는 유해의 처제들이었다. 이들은 요동 출신으로 3자매였다. 그들 자매는 귀영개의 양녀이기도 하였다. 유해는 귀영개의 사위가 되자 자칭 후금국의 부마라 하였다.

후금국은 강홍립과 박난영게게 각각 요동사람 500명씩을 주어 부리게 했는데 유해가 조선에 들어올 때 강홍립과 박난영, 오신남의 처들을 데리고 왔으므로 그들 500명도 따라왔다.

도성에서는 양식이 없어 각도에 나누어 거주하게 하였다.

1627년 4월 28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철병하자 강홍립과 박난영은 그들의 아들들을 인질로 보내고 그들은 조선에 남았다.

이들 두 사람의 모친이 몇 년 전에 죽었으므로 추복하였다.

오신남은 자식이 없어 도리없이 후금군에게 끌려갔다.

강홍립은 자기 행동을 뉘우치고 선영에 가서 눈물로 하직하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하였다. 인조가 새 개각을 단행하여 영의정에 김류, 우의정에 이성구, 이조판서에 최명길, 예조판서에 강석기, 호조판서에 이경직, 병조판서에 구굉을 임명하고 좌의정 홍서붕을 유임시켰다.

그간의 예로는 재상자리를 맡으려고 별별 공작을 다 벌인 벼슬아치들이 이번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재상자리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김신국 같은 사람은 아들을 청에 볼모로 보내지 않으려고 핑계를 대고 재상의 반열에서 빠지려고 하였다. 신경진 같은 이는 이런 약아 빠진 벼슬아치들의 처사에 분노해 소리쳤다고 한다.

“쥐새끼 같은 무리가 나라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다.”

김류의 서녀 딸이 포로로 청으로 잡혀가게 되었다. 인조가 용골대에게 그 처녀를 풀어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김류(영의정)가 용골대의 참모 정명수에게 옷깃을 잡으며 하소연을 했다.

내 딸을 보내주면 천금을 주겠소, 정명수는 옷깃을 뿌리치고 가 버렸다. 이 일로 영의정이 포로 값을 올렸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양주의 화첩동의 주봉은 불암산의 석봉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산은 갑주와 같아서 명장이 많이 날 형세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남이흥의 9대조인 경열공, 8대조 충경공 재의 무덤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재의 현손인 남이 병조판서와 5대손인 한성판윤 남치근, 8대손인 남이흥이 태어났다고 전해 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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