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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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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12.30 16:16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적장 아민도 머리 숙여 추모했다

글/ 남균우

따라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대장부의 말이므로 바로 영제(令弟)를 돌려보내고 대신과 날짜를 약속해서 접전하여 누가 이기고 누가 지든 간에 다시 맹약을 정하는 것도 늦지 않습니다. 귀국 왕이 곧바로 화친하고 싶다면 속히 맹세하여 두 나라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생민들의 행복이니, 존재(尊裁)하십시오.”

인조가 임진강이 무너지려는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화친 쪽으로 정책의 방향을 잡자 수많은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다. 이를 무릅쓰고, 원훈(元勳) 이귀, 김류의 지지를 받아가면서 화친을 맹약하는 결심을 했다. 2월 30일에 인조는 화친을 맹약하는 것에 대하여 의논하고 화친의 불가피성에 대하여 말하였다.

3월 3일에 인조는 후금 사자 유해와 함께 후금과 화친을 맹약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밤 상이 대청에 나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는 예를 몸소 행하였다. (중략) 도승지가 상에게 향을 피우라고 고하자, 상이 향을 피웠다. 좌부승지 이명한(李明漢)이 맹세문을 읽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金國)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잡다한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 만약 우리나라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서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 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중략)” 하였다.

“조선 국왕은 지금 대금국 이왕자(二王子)와 맹약을 한다. 두 나라가 이미 아름다운 화친을 맺었으니, 이후로는 마음과 뜻을 함께 하여야 한다. 만약 조선이 금국을 적대시하여 병마(兵馬)를 정비하거나 성보(城堡)를 새로 세워 불선한 마음을 갖는다면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며 이왕자도 만약 불량한 마음을 갖는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다. 만약 양국이 두 왕이 마음을 같이 하고 덕을 같이 하여 공도로서 처신한다면 하늘의 보호를 받아 많은 복을 누릴 것이다” 하였다.

맹세하는 절차를 마치자, 유해는 돌아갈 것을 고하였다.

조선의 병조판서 이적구와 후금의 사자 유해는 화친에 합의,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나라로 부르기로 하였다.
화친이 성립되자 사람마다 이를 통탄스럽게 여겼다.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성균관 유생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오랑캐의 사자와 박난영의 목을 베어 함에 담아서 명나라에 보내야 할 것이며 의리를 내세우고 화의를 배격하여 마지막까지 한바탕 싸워야 한다. 이 주장을 시작으로 화의를 반대하는 글을 올렸지만 허공을 치는 메아리였다.

대사간 윤황은 화친을 항복이니 화친하지 말 것을 상소했고, 전한 강석기 등이 두둔하고 나서는 등 반대가 극심했으나 인조가 원훈(元勳) 이귀, 김류, 최명길 등의 주화론을 채택하여 정묘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1)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평산 이남으로 더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할 것.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2)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삼았다.

이 화친의 맹약은 비록 형제의 나라로 규정하기는 했지만 후금군을 철수시키기로 한 것과 명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후금군의 무력에 굴복한 일방적인 조약이라고 볼 수는 없다. 비록 조선이 군사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후금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할 수 없다는 약점을 잘 활용한 협상이었다.

후금군이 침입한 지 한 달 20일 만에 정식 화친이 성립되었다. 두 나라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는데 아우는 조선이었다.

전쟁이 벌어진지 7개월 만에 실제적인 종전이 이루어진 셈인데, 안주성 싸움 이후로는 무인지경으로 한 번도 대항을 못하고 지리멸렬이었으니 임금은 임금대로 중신은 중신대로 속수무책으로 갈팡질팡하였다.

임지왜란은 7년 기간의 긴 전쟁이었으니 전쟁의 피해가 컸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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