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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79>

5부. 비장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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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12.22 16:44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적장 아민도 머리 숙여 추모했다

글/ 남균우

그러나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궁궐과 관아 물건은 불태우지 않았다. 서울의 유도대장인 김상용은 후금군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도성이 크게 혼란하여 선혜청과 호조가 도적이 지른 불에 타버렸다.

인조 일행은 무사히 강화에 도착했으며 종묘의 신주도 모시고 갔으나 안치할 건물이 마땅치 않아서 한구석에 쌓아 놓다시피 했고 그런 혼란 중에 신주 하나를 분실하는 사고가 일어나 책임자인 영의정 윤방은 그 분실사건을 책임지고 귀양까지 갔다 와야 했다.

안주성이 무너진 후로는 무인지경으로 패퇴하였으니 윤훤과 정호서의 예가 그것이고 안주가 무너지고 적이 숙천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자 24일에는 전주로 세자를 보내 분조를 단행했다. 그래서 도체찰사 이원익, 좌의정 신흠, 수평부원군 한준겸은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남하했고 또 병조참판 이민구, 순검사 심기원, 통어서 류비연, 동양위 신익성 등도 세자를 수행하게 했다. 26일에는 인조도 도성을 버리고 29일 한강을 건너서 강화도의 진해루에 이르렀다.

평안감사가 안주성 함락을 조정에 보고하자 분조할 준비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체찰사와 호소사를 남쪽으로 보내어 근왕병을 징집하게 하였으나 소식이 없었고 병조판서 이정구는 군병의 수도 파악하지 못했다. 인조가 도감군(훈련도감)과 수원병이 몇 명이냐고 묻자 병판은 도감군을 각지로 분송하여 남아 있는 수가 얼마인지 모르며 수원군의 수는 나에게 알려주지도 않았다고 하니, 왕은 병을 주관하는 장관이 병수를 모른다고 하니 옳은 일인가 하고 힐책하였다.

함경도와 강계 등 7읍에는 정병이 건재했으므로 이들을 원병으로 끌어다 쓰라는 왕명이 있었으나 구체적인 활동이 보이지 않았으니 한심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국난을 당한 당시 위정자들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북병사 윤도와 남병사 변흡(이괄의 난 때 안령 싸움에서 남이흥과 같은 지역에서 전투를 하여 공로를 세워 진무공신 2등에 오름)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에 주둔하였다.

조정에서는 충청·경상·전라도 병사에게 삼도의 병사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임진강을 수비하라고 명했으나 여러 장수들은 그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고, 충청수사만이 수천 명을 이끌고 동작나루에 진을 쳤다.

따라서 공주 이북은 한 곳을 제외하고는 방비가 전혀 없는 상태였으니 당시 우리의 국방 태세가 얼마나 허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그 당시 조정에서는 주전파와 화전파로 갈리어서 대립을 했으며 주전파도 겉으로는 화친을 해서는 안 된다고 큰 소리 쳤지만, 속으로는 화친이 성립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또 화친파들은 주전파들의 화친 반대 여론에 눌려 드러내놓고 화친을 주장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최명길만은 자기의 소신대로 내놓고 화친을 당당히 내세웠으며, 그로 인해서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명분으로 보아서 후세 사람들의 추앙은 주전파들에게 뒤지지만 사실상으로는 당시의 정세로 보아서 대단히 옳게 판단을 했고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했으니 진짜로 훌륭한 분은 이 분이 아닌가 여겨진다.

서울 장안에는 후금군들이 이미 육박해 들어오므로 일시에 무너지고 흩어져 주전파로 유도대장인 김상용이 긴급명령을 내려 어고(창고) 및 병조·호조·태창(太倉)·선혜청과 도성 내 병영의 모든 창고를 불사르게 하였다.

이로 인해 국가의 비축 양곡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그런 후 또 김상용이 강화도에 들어감에 따라 노량진에 쌓아두었던 양곡 1천여 석도 잃어버리게 되었고, 여인길이 수척의 선박으로 겨우 200여 석만을 수습하였을 뿐이다.이런 사례를 보아 조정을 받드는 중신들이 얼마나 당황하였고 허둥댔나를 짐작케 한다.

외부의 침공이 있을 때마다 가족과 고향을 보호하고 침공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실리와 명분을 바탕으로 조석 각 지역에서 의병이 결성되어 거사를 했다.

후금군의 침공을 먼저 받은 신천, 용천, 정주 등지에서는 이에 자생적인 의병이 조직되었다. 선천 주민 2000여 명은 지득남을 중심으로 의병을 결성하였고, 용천의 의생 이립·철산의 김려기 등과 정주의 주민들은 스스로 의병을 조직하여 후금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수행하여 배후를 위협 교란하는 작전을 수행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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