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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78>

5부. 비장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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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12.21 17:14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적장 아민도 머리 숙여 추모했다

글/ 남균우

그리고 또 보고하였다.

“별장(別將) 김완은 안주가 포위되었을 때를 당하여, 윤훤이 병졸 1700명을 주어 달려가 구원하도록 하였는데, 잘못 들었다고 핑계하고 평양으로 환군하였습니다. 군법으로 헤아려보면 중벌을 면하기 어렵지만, 신에게 장관(將官)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우선 장형만 시행하고 그로 하여금 공을 세워 충성을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말해주듯 남이흥은 평양감사로부터의 구원군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은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함락을 당하였으니 더욱 비통한 심정으로 분사(焚死)를 택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안주성이 함락되고 후금군이 남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평양성 안의 민심이 동요되어 도망하는 병사와 백성의 숫자가 늘어났다. 윤훤은 조정에 평양의 민심을 진정시키고 군 기강을 바로 잡으려 했으나 커다란 효과가 없이 성을 빠져나가는 인원만 늘어 중화로 퇴각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적병이 이미 숙천(肅川)에 이르렀는데 본 성의 군병들은 모두 놀라서 도망가 버리고 텅 빈 성에 올로 앉아 있자니 이렇다 할 계책이 떠오르지 않아서 군관(軍官) 40여 명을 이끌고 중화(中和)로 퇴각하여 머물고 있습니다.”

“박규영(朴葵英)이 평양을 관할하는 대장으로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모아들여 심지어 경작하도록 권장하고 있으니, 오래 머무를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평양성이 함락당하던 때 성 안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약탈하다가 적이 물러가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굳은 뜻으로 적에게 붙어버렸으니 더욱 통분합니다.”

황주에서 5천여 명의 황해도 병력을 지휘하여 제2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황해병사 정호서는 후금군의 진격을 저지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평안감사가 평양성을 버리고 성천으로 옮겨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정호서는 자기 휘하의 소수병력으로는 후금군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월 25일 병력을 이끌고 봉산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1월 20일에 도체찰사 장만은 조정에 후금군이 평양에 머물고 있고, 선봉대는 황주에 도착하였으며, 평안병사 신경원(申景瑗)의 군대는 밤에 놀라서 무너져 흩어졌고 평산도 방어할 기세가 없다고 보고하였다.

평안감사 윤훤과 황해병사 정호서가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는 보고가 도착하자 조정에서는 황급하여 김기종을 평안감사로, 신경원을 남이흥 대신 평안병사로 삼고 도사를 파견하여 윤훤과 정호서를 체포해 오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 좌의정 윤두수의 아들이자 당시 영의장 윤방의 아우이며 평양성을 버리고 황주로 도피했던 심의겸의 사위 평안감사 윤훤은 목이 베어졌고 황해병사 정호서는 귀향을 갔다. 최명길이 말했다. 윤훤을 엄하게 다르리지 않으면 장차 다른 사람을 징계할 수 없다고 하여 잡아다가 문초하기로 했다. 그리고 강화에서 사형에 처했다.

신임 평안감사 김기종은 함락된 평양지역 상황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현재 평양은 박규영(朴葵英)이 다스리고 있다. 박규영은 사르흐 전투에서 후금으로 강홍립과 함께 포로로 잡혀간 장수 박난영(朴蘭英)의 동생이다. 박난영은 후금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평양은 박규영이 대장으로 있으면서 경작을 주민들에게 권장하고 있었으며, 평양성이 함락 당하던 때 성 안의 주민들이 무리지어 약탈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적이 물러가면 보복을 당할까봐 후금군에 적극 협조하여 살 길을 도모했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안주성이 함락되자, 조정에서는 후금군을 막기 위해 김상용을 유도대장, 여인길을 부유도대장으로 임명하여 도성에 남아 서울 도성을 지키게 하고, 24일에는 영의장 윤방, 우의정 오윤겸, 이조판서 김류, 찬성 이귀, 훈신 최명길, 김자겸, 장유, 병조판서 이정구 등이 왕을 호종하였다. 왕은 전국에 고유문을 보냈다.

안주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는 1월 27일 마침내 강화도로 파천의 길을 떠났다. 임금의 수레가 자취를 감출 때쯤 서울의 유도대장 김상용(金尙容)은 조정에 서울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서울을 호위하는 책임을 지는 장수들까지 덩달아 몸을 숨겨 버렸다. 백성들은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서울을 벗어났고 피난을 가지 못한 사람들은 양반집 개와 닭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빈 집을 털었다. 포졸들이 막으려 하면 칼을 들고 대항하는 험악한 분위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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