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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77>

5부. 비장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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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12.20 18:25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적장 아민도 머리 숙여 추모했다

글/ 남균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서 전쟁은승리하지 못할 것이고 아들이 죽음으로 결단하리라는 것을 알고 미리 집으로 와 있었다고 한다.

모친은 막상 남이흥이 지키던 안주성이 무너지고 아들 남이흥이 산화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견한 듯이 비장하게 말하였다.

“아버지는 임진왜란(무술년)에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었고, 아들 또한 나라를 위하여 정묘호란에 싸우다 죽으니, 30년 사이에 부자가 모두 나라를 위해서 죽었구나! 두 사람의 죽음은 모두 영광된 것이니 옛 사람들에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다. 이에 무슨 바람이 있으리오만 많은 사람들이 그 화로 인해 불귀의 혼이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며 망인들의 억울함이 통탄스런 한이로다!”

그리고 애통에 찬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나라가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며 우리 가족들도 또한 어찌 이 지경이 되었는고?”

이런 남이흥의 노모에게는 임금이 예조에 하교하여 담당 고을로 하여금 매월 식량과 반찬을 대라고 하였으며, 만약 병을 앓으면 아뢰게 하라고 하였다.

1653년 10월 16일에 김자점은 인조에게 남이흥의 노모가 작고하여 조상할 것을 건의하였다. 인조는 남이흥이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담당부서로 하여금 특별히 부의를 내리고 또 본도로 하여금 석회와 조묘군(造墓軍. 묘를 조성하는 일꾼)들을 주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남이흥의 부인 역시 하동정씨로 세조조의 영의정이었던 정인지의 6대손 희적의 딸인데 남이흥과 동년생으로서 예의범절이 바르고 유순하며 품행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부인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첩을 대하는 데도 은의로서 대하였고, 종을 다루는 데도 어진 마음으로 대하여 안팎 일가들이 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남편인 남이흥에게는 항상 손님이 많았는데 항상 술대접을 잘 했으며, 술이 없으면 옷을 팔아서라도 술이 떨어지는 일이 없게 했다 한다. 부인은 시어머니의 희비를 얼굴빛을 살피어 알고 어김없이 도와드렸으며, 어떤 일이 있으면 정성을 다하여 기쁘게 해드렸다. 경삿날은 자리를 마련하여 온 정성을 쏟았으며, 음식이 생기면 어머니의 분부대로 이웃에 나누어 주었다.

위의 남이흥의 노모와 부인의 행실은 한국 부인들의 전통인 부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유씨부인 같은 위대한 어머니이기에 이러한 웅혼한 남이흥을 길러내지 않았나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남이흥의 작은부인(부실) 연안김씨는 그 남편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쳤으니 이 또한 고귀한 죽음이다.

남이흥은 어머니에게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니 봉양에 힘을 기울여 항상 기쁘게 해드렸다고 한다. 또 남이흥에게는 자매가 하나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자매의 산소가 충장공 사당 옆에 있는 산에 소재한다. 남이흥은 자매가 죽은 후 그녀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폈고 또 잘 살도록 배려했다. 남이흥에게 서제와 서매가 있었는데 생업을 주선해 주는 등 역시 잘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평안감사 윤훤(尹暄)은 남이흥의 장계로 안주성이 위급하다는 급보를 받았었다. 이때 평안감사 윤훤은 휘하에 8000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고, 안주까지는 하루면 진주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1629년 1월 17일에 평안감사 윤훤은 의주가 후금군에게 함락당하였으며, 적군에 강홍립을 비롯한 우리나라 출신의 사람들이 있으며, 적장 8인의 그 기세가 아주 강대하기 때문에 안주가 적의 침공으로부터 지탱하기 어려울 것 같아 별장 김완에게 별승군 1700명을 이끌고가 구원하도록 지시하였고, 평양은 5800명 정도의 군사가 지키고 있으며, 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민병을 이끌고 입성하라고 지시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방금 도망쳐 온 사람이 와서 고하기를 ‘노병(奴兵)이 어젯 밤에 의주(義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전 창성부사(昌城府使) 박성인(朴姓人), 선사포첨사(宣沙浦僉使) 오성인(吳姓人) 및 한윤(韓潤)이 다 적진에 이었으며, 강홍립·이영방(李英芳)은 대장이 되었고 적장은 8인인데 그 기세가 매우 거세다’ 하였습니다. 안주는 형세가 지탱하기 어려울 듯하여 해서의 별승군(別勝軍) 1천 7백 명을 이미 김완(金完)으로 하여금 이끌고 가 구원하도록 하였습니다. 평양은 아병(牙兵) 2천 8백 명과 삼수병(三手兵)·정초병(精抄兵) 등 3천 명이 있어 이들로 군대를 나누어 성첩(城堞)을 수비하도록 하였고, 또 주변에 있는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각각 민병을 인솔하고 입성토록 하였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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