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72>

5부. 비장한 순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15.12.13 16:37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적장 아민도 머리 숙여 추모했다

글/ 남균우

명나라도 감동시키다

이 무렵 남이흥의 재종(6촌) 남이웅(이괄의 난 때 3등 공신, 후에 좌의정 역임)이 바다를 건너 명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옥하관(玉河館)에 투숙하였다.

그런데 그때 황궁(명나라의 수도, 지금의 북경에 있는 궁)으로 통하는 길거리에 남이흥이라고 쓰여진 붉은 현수막이 웅장하게 붙여진 것을 보았다. 역관에게 연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그대 나라에서 죽음으로써 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남이흥의 이름을 써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것인데, 곧 명나라 조정에서 그 절의를 포상하는 특전이다. 무릇 절의가 있으면 그 이름을 붉은 현수막에 써서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국의 포상하는 법이요.”

그리고 도성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길거리에서 남이흥이라고 쓴 붉은 현수막을 관람하고 있었다. 남이웅은 그 역관에게서 남이흥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놀라 그 깃발 아래에 가서 곡을 하였다. 명나라 사람들이 그가 남이흥이 친족인 줄 알고 그를 더욱 융숭하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남이흥이 신하로서 제 나라를 위하여 어렵게 순국한 것을 중국 조정에서 관여할 바는 아니겠지만 이토록 특별히 대해 준 것은 특수한 예이다. 남이웅이 귀국하여 안주성이 함락된 날과 중국 조성에 표중(表忠)을 하던 날을 참고해 보니 그 사이가 6, 7일인데 명나라에서 수천 리 밖에서의 일을 짧은 시간에 탐지한 것은 그들의 정보능력이 빠름을 알 수 있는 일이다.

남이웅은 일가친척들을 대할 때는 꼭 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나와 이흥은 내가 형으로 가깝게 지내는 처지였다. 그는 일찍부터 문장과 명망이 높았다. 내가 항상 말하기를 이흥은 낙척(落拓. 기개가 활달하고 뜻이 큰 것)한 인물이라고 칭찬을 했다.”

남이흥이 무과에 응시하기 위해 글 읽기를 그만두자 남이웅이 말했다.

“정부는 장부다. 그대는 무를 익혀 공명을 얻으리라.”

어느 날 남이웅이 꿈을 꾸었는데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있는 붉은 비단에 남이흥의 이름 석자가 금빛으로 쓰여져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남이웅이 꿈을 깨어 말하기를, ‘장부여 그대는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하고 말하였으며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는 갑자년 이괄의 난 때 역적을 토벌한 공훈을 세울 것과 또 정묘호란 때의 순국을 미리 예시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데 비상한 인물의 일은 미리 정하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이야기 했다 한다.

이 기록으로 보아 남이흥의 죽음이 나라를 위해 숭고하고 우대한 순국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남이흥의 장엄한 죽음은 중국의 야사에도 특서되었다고 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열렬한 충성과 병병한(빛나는) 절개는 적도 능히 굽히지 못했고, 불도 또한 태우지 못했네! 기운은 산하보다도 장하였고 이름은 중국 천지에조차 가득차 있었네! 예부터, 사불사(죽어도 죽지 않았다)라는 말은 남이흥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여겨진다.”

안주성 함락 후 얼굴이 누군지 알 수 없는 그을린 시신 하나가 있었는데 그 의복으로 보아 남이흥의 시신 같았으므로 관에 넣어 가매장하여 두었다. 1627년 인조 5년 4월 6일에 비국이 안주의 남이흥·김준의 상구를 호송하도록 청하였다.

남이흥의 자손들이 와서 확인하기를 기다렸다가 광주군 중부면 탑리에 장사지냈다. 남이흥이 장례는 인조의 명에 따라 국장으로 치러졌고 불천지위 제사(장자에게 그 지위가 계속 세습되는 제도로 인물에 관계없이 고을 수령에 임명하고, 불천지위를 받은 분의 제사를 계속 영구적으로 지내도록 하는 제도임)를 지내도록 하였다.

남이흥이 순국한 뒤에 장례를 치를 때는 인조께서 친히 납시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관 위에 덮어주셨다. 순국한 충신에 대한 배려와 감동이 얼마나 컸던 가를 알 수 있다.

남이흥에게 내린 사패지는 그 넓이가 당진군 대호지면 전부와 정미면 일부까지 포함되는 넓은 땅이었고 남이흥이 근무했던 연안에도 땅 1만 평을 사패지로 하사하였으니 이것 역시 충신에 대한 배려가 매우 컸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또 불에 타죽은 시체가 1041구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최후의 항전 수단으로 화약고에 불을 질렀다는 증거가 된다.

<계속>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