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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70>

5부. 비장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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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12.09 16:22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적장 아민도 머리 숙여 추모했다

글/ 남균우

성이 장차 함락될 무렵에 남이흥과 김준이 중영(지휘부)의 누상에 있었다. 이때 초관(哨官) 김여수(金汝水)가 치달아 누 밑에 도달하자 남이흥이 사태는 이미 아군이 적군에게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라고 탄식하였다. 그리고 이내 손가락을 화약궤를 가리키며 나의 죽음은 이것에 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화약고에 불을 붙여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이하 나머지 부분의 내용은 위의 ‘조선왕조실록’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과 같다.

남이흥에게 장돈과 김양언이 성벽에 사수와 포수를 배치하자고 강력하게 건의했을 때의 일시(日時)가 위의 ‘조선왕조실록’보다 더 자세히 ‘賊未犯城時’라고 기술하였다. 개천군수 장돈의 죽음도 자기 구역의 포루를 지키다가 화약으로 스스로 불타 죽었다는 상황과 구성부사 전상의(全尙毅)와 동쪽 포루장(砲樓將) 김언수가 화약에 투신해서 죽는 것은 적을 죽이다가 전사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을 하고 난 뒤 이 둘은 혹은 사격을 하다가 적을 가격하면서 사상자를 많이 냈다는 상황이 더 자세히 기술됐다. 성이 함락당할 당시 6000여 명이 죽었는데 그 중에 절의하다가 죽은 자도 다수인데 자세히 그 사실을 알 수 없다고 기술하였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사수와 포수를 성벽에 배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안주성 함락 5개월이 지난 후 평안감사 김기종, 도원수 장만, 신경원이 흩어져 도망했던 관리들이 이제와 돌아와서 모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안주성 함락 때 박천군수 윤혜와 안주 출신 함응수가 전사했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를 통해서 박천군수(博川郡守) 윤혜는 서문장(西門將)으로서 적이 성에 올라오자 주장(主將)을 구하기 위해 중영(중앙지휘소)에 가담하여 싸우다 주장인 남이흥과 함께 분사하였음을 알 수 있고, 함응수는 북문장으로 적이 성벽에 올라왔을 때까지 자신의 방어지역을 지키다가 전사했음을 알 수 있다.

최일선의 방어선인 안주성의 전투 결과와 영향은 후금의 후방 침공을 방어하는데 큰 부담을 안게 될 정도로 아주 중요하였다. 남이흥은 군사력이 수적으로도 3천 명으로 3만여 명의 후금군에 비하여 열세인 상태에서 치선을 다해 분투했지만 최일선의 주장(主將)이 항복함으로써 조선군에게 치욕을 안겨주는 것 대신 화약고에 불을 붙여 적과 함께 죽는 숭고한 분사(焚死)를 택하였다.

이전의 패전인 능한산성의 대장 정주목사 김진과 곽산군수 박유건이 적에게 항복함으로써 그들의 처첩들이 후금군들에게 간음을 당하고 행군을 할 때는 그들이 각각 그들의 처첩의 말고삐를 잡았다는 수치스러운 행위가 능한산성 전투 경위 편에서 ‘조야기문’ ‘일월록’에 기록된 것을 언급하였다. 만약에 남이흥이 관서지방과 해서지방의 주장(主將)이 순변사로서 항복을 했더라면 본인이 김진이나 박유건처럼 당했을지도 모르는 수치는 도외시하더라도 조선군 전체에 끼치는 사기 저하는 무척 컸을 것이다. 그가 비록 전력을 다하다가 후금군에게 패전했지만 끝까지 분사(焚死)로써 항전한 기개는 조선군에게 크나큰 힘이 됐을 것이고 귀감이 된 것이다.

당시 남이흥의 옆에는 두 부하가 있었다. 그들은 남이흥 옆에서 그를 도와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비장 정연록이었으니 영남인이었으며 영변에서부터 가장 사랑하고 믿는 처지였고, 또 애남(편비; 영변 관노)도 다같이 남이흥을 따르는 사랑하고 믿는 처지였다.

그들은 물러서지 않고 남이흥이 화약이 있는 장대루에 불을 지르려 하자 루에 불길이 닿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것을 보고 남이흥이 손을 저어 물러가도록 재촉하였으나 두 사람은 태연하게 서 있는 채로 크게 통곡을 하며 말했다.

“공은 나라를 위하여 죽고 우리들은 공을 위하여 죽겠습니다.”

그리고는 난간을 붙들고 물러서지 아니하고 계속 싸우다가 끝내 남이흥과 함께 타죽었다. 그들은 안주까지 남이흥을 계속 따라와 같이 근무했고 결국 생명까지 상전을 위해 바친 것이다. 해마다 남이흥의 제사 때는 이 두 사람에게도제상을 차려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마침내 안주 방어선이 무너지고 후금군이 관아의 내정으로 돌입하기에 이르렀을 때 최후의 순간이 왔다고 깨달은 남이흥은 구차하게 생명을 보존하여 적의 포로가 되느니보다 떳떳한 죽음을 택하기로 하고 미리 준비했던 화약고에 불을 질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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