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69>

5부. 비장한 순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15.12.08 16:06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적장 아민도 머리 숙여 추모했다

글/ 남균우

“안주(安州)는 여러 해 동안 전력한 곳인데 또 함락을 당하여 평양 동쪽의 여러 성들이 사기를 잃고 말았습니다마는 한 번 싸워 죽는 길밖에는 다시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신경원(申景援)으로 하여금 황주(黃州)·평산(平山)을 진구(進救)하도록 독려하였는데 봄철 진흙탕이 무릎까지 빠져서 사람과 말이 진격하기가 곤란합니다.”

안주성이 함락된 지 보름 후에 비국에서, 안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장수 중에서 유독 남이흥만이 표창 증직되었고, 나머지 장수들은 확실한 보고를 기다려 시행하려고 했다고 한다. 비국은 마침 평안감사 윤훤의 장계에 성 안에서 실상을 목격한 초관(哨官) 김여수가 살아 돌아와 말한 바를 통해 나머지 장수들의 최후의 모습을 알게 되어 그들에게 표창을 내릴 것을 인조에게 건의했다. 평안감사 윤훤의 장계에 김여수가 여러 장수들의 최후에 대해 목격한 실상에 대하여, “김준(金浚) 부자는 남이흥과 한 곳에서 가장 장렬하게 분사(焚死)하였고, 장돈(張暾)·송도남(宋圖南)·이상안(李尙安)·김양언(金良彦) 등도 모두 살신보국(殺身報國)하였다”고 쓰여 있다면서 그들에게 표창을 내릴 것을 건의했다.

안주성이 함락된 지 2개월 후에 평안감사 김기종(金起宗)이 안주성이 함락될 당시의 정황에 대한 정보를 종합하여 조정에 보고하기를, “안주목사 김준의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불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죽었고, 김준의 첩인 양녀(良女) 김씨는 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

“(전략) 개천군수(价川郡守) 장돈(張暾)은 김양언(金良彦)과 함께 남이흥(南以興)에게 강력히 간쟁하기를 ‘성첩에 있는 군사는 모두 민정(民丁)들이니 중영(中營)들이니 중영(中營)의 사수(射手)·포수(砲手)를 네 개의 부대로 나누어 무너지는 곳에 따라 구원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남이흥이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성이 함락되려 할 때 장돈은 ‘일은 이미 틀렸다’하고 끝내 자기의 구역을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김양언은 중영에서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며 ‘절의는 높지만 장부(丈夫)는 아니다’하고 성에 다가가서 적에게 활을 쏘다가 화살을 다하자 편곤(鞭棍)으로 많은 적을 쳐죽이고는 마침내 북당수(北塘水)에 투신하여 죽었습니다. 구성부사(龜城府使) 전상의(全尙毅), 동루장(東樓將) 김언수(金彦秀)도 김양언과 함께 적을 쳐죽이다가 힘이 다해 죽었습니다.”

개천군수 장돈과 태천현감 김양언이 주장(主將) 남이흥에게 지휘부의 포수와 사수를 적에게 위태로운 성벽을 담당하고 있는 민간인들에게 지원하도록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래서 그들이 안주성의 방어 내지 함락 지연을 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한탄했다는 정보는 남이흥의 분사를 무모한 행위로 여기게 한다. 그러나 주장(主將)이 지휘부의 장수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사수와 포수를 지휘부에만 포진시켰다는 말은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로 여겨진다.

위의 보고를 통해서 보면 아직 어느 성벽도 적에게 함락당한 상태가 아닌 상황에서는 막강한 후금군의 화력을 맞서기 위해서는 당연히 주력의 총과 대포의 화력을 사방에 배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미 후금군이 성을 넘어와 지휘부를 에워쌌을 때는 사수와 포수를 지휘부 주위에 배치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았을까.

위의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평안감사 김기종의 장계 ‘승정원일기’에는 안주성 전사자 표창의 근거 사실을 위해 본토인들의 말을 채록하여 안주성 함락 당지의 상황을 기술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후금군이 성 밖에서 주둔하고 있다가 여러 차례에 걸쳐 항복을 권하였을 때 안주목사 겸 방어서 김준은 남이흥에게 성을 의지하고 일전을 할지언정 화(和; 항복)의 한 자라도 논할 수 없다고 남이흥에게 건의했다. 남이흥은 항복을 거절했다. 후금군의 조선국 침공에 인도자로 온 박난영과 오신남(강홍립을 따라 명군을 원병하기 위해 사르흐 전투에서 후금에게 항복함)이 성 밑에 도착하여 평안병사 남이흥을 만나 보기를 두세 번 청하였다. 남이흥 등은 말을 타고 성 위에서 그들을 잠시 보고 조국을 배신하고 적을 따른 죄를 나무랐다. 박난영과 오신남은 자신들은 단지 양국이 화친한 후에 조국에 돌아와서 죽을 뿐만을 원할 따름이라면서, 대장인 남이흥이 성에서 나와 적장을 본다면 화약(화친)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남이흥은 그렇다면 그대들이 말한 대로 한다면 항복이지 화친이 아니다. 박난영과 오신남이 남이흥이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후금군에 알린 후에 적군이 성에 진군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계속>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