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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대도무문은‘東上’異夢에서‘3당합당’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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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11.26 18:43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정완영 세종본부 부장
지난 22일 새벽 0시 22분.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을 지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새로 제정된 국가장 제도의 첫 수혜자가 돼 26일 국가장이 치러졌다.
 
모든 언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죽음을 놓고 연일 그를 조명하고 있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밑거름이 되신 분, 민주화의 거산(巨山), 23일 간의 목숨을 건 단식, 처음으로 제명안 통과된 국회의원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문민정부를 열어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로 금융개혁을 이룬 대통령으로 평가하며 나라의 전통과 같이 돼 버린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우를 극진히 하고 있다.
 
현재 한국 정치를 대표하고 있는 사람들은 너나 없이 ‘나는 YS의 정치적 아들’로 자처하고 있고, 유언과 같다는 ‘통합과 화합’을 앞세워 ‘상도동·동교동이 함께 상주를 한다’는 말까지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필자는 김영삼 전 대통령 죽음을 계기로 아주 오래 전 잊고 지냈던 기억의 편린을 끄집어 내 다시 한 번 곱씹어 본다.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웠던 1987년을 다시 생각한다. 역사의 현장에서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견디어 내려고 했고, 개인사적으로는 큰 슬픔이 있었던 1987년으로 돌아가 본다.
 
그 해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나라가 온통 시끄러 웠다. 경찰의 발표에서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이 아직도 회자될 정도로 커다란 사건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불러냈고,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열망이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온 국민들이 원했던 민주화의 바람은 6월 항쟁으로 이어져 화이트 칼라까지 시위에 함께하며 결국은 6·29 선언을 끄집어 내고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게 됐다.
 
이후로 대통령 출마를 놓고 ‘東上’異夢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야당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김대중과 김영삼. 지금은 주류, 비주류 등으로 나뉘지만 김대중과 김영삼이 야당을 좌지우지 하던 시절에는 그 두사람이 살고 있던 동네 이름을 따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로 나뉘어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야당에서 하나의 목적을 위해 뛰었는데 대통령 직선제가 되고 나니 ‘동교동 김대중과 상도동 김영삼이 다른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그래서 ‘東上’異夢이다.
 
12월 두 사람은 결국 함께 대통령에 출마했다.
 
야당의 분열로 여당에게 대통령을 헌납할것이라는 우려 속에서도 ‘군정종식’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고 출마한 김영삼과 민주화 인사들의 ‘비판적 지지’ 결정으로 지지를 받은 김대중도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노태우에게 정권을 넘겨줄 수 밖에 없는 결과를 낳았다.
 
양김의 정치적 욕심으로 인해 생긴 배신감 덕분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김영삼과 김대중을 잊었다.
 
1990년 김영삼은 ‘3당 합당(당시 ‘3당 야합’이라는 말도 있었음)’이라는 묘한 카드(?)로 노태우·김종필과 손을 잡고 대통령이 됐다. 그 때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로 ‘대통령을 잡으려면 어느 굴에라도 들어간다’로 들린 것은 필자만의 착각일까.
 
민주화를 위해 애써 온 모든 사람들에게 상실감을 안겨 준 채 ‘東上’異夢을, 3당 합당으로 대통령을 향한 걸림돌을 완전히 제거하면서 ‘대통령’으로 나아가는 탄탄대로를 다졌다.
 
대통령이 되고서 임기가 끝날 때 쯤 김영삼은 ‘IMF’라는 듣도 보도 못한 것으로 국민들 눈에 눈물을 만들었다.
 
경제, 사회적으로 시기를 구분할 때 빼놓지 않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IMF 이전과 이후다.
 
‘IMF’가 무엇인지 잘 몰랐던 국민들은 그저 예사로 건너가는 감기거니 생각했다. 
 
정권이 김대중으로 바뀌고 ‘IMF'의 후폭퐁은 고스란히 국민에게로 전가됐다. 직장을 잃은 가장들은 노숙자로 전락하는가하면, 경제적 궁핍함 속에 죽음으로 내몰렸고, 가정이 해체되는 아픔들을 겪었다.
 
‘김영삼’은 죽었다. 그의 죽음을 두고 ‘영비어천가(?)’만 부를 것이 아니라 그가 진정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냉철히 따져봐야 할 때가 왔다.
 
어릴 때부터 꿈꿔 왔다는 ‘대통령’에 대한 김영삼의 강한 집착이 ‘東上’異夢과 ‘3당 합당’을 가져왔고, 필자와 같은 평범한 소시민이 30년 가까운 아주 오랜 동안 그토록 ‘거대한 산(巨山)’과 같은 김영삼을 기억 속에서 통째로 드러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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