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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날씨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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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11.24 17:04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정희 시인. 둥그레동인회장
메주를 쑤었지요. 콩을 씻어 가마솥에 삶았습니다. 어지간히 식은 뒤 밟아서 메주를 만들었습니다. 쳇바퀴에 무명천을 깔고는 꼭꼭 밟아댑니다. 모퉁이까지 빈틈없이 박아야 깨지지 않거든요. 그렇게 닷 말 가웃 쑤려니 줄잡아 사흘입니다.
 
그 다음 한 닷새 말렸는데 곰팡이가 잔뜩 슬었습니다. 그거야 뭐 털어내면 되겠지만 쩍쩍 갈라진 게 더 속상하군요. 깨진다고 발목이 시큰하도록 밟았었지요. 추울까 봐 따스한 날을 잡은 데다가 연 이틀 비까지 내린 탓입니다.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만들 때는 없던 일입니다. 만들고 나면 난간에 올려놓을 새 없이 얼어붙었죠. 하룻밤만 둬도 돌덩이처럼 딱딱해져서 곧장 매달았는데 물렁물렁 깨지고 곰팡이까지 슬었으니 심란할 밖에요.
 
맛있는 된장을 먹게 될지 걱정입니다. 추운 날 만들면 괜찮았을 걸 싶은 거지요. 이제는 뭐 할 수 없지만 수월하게 만든 음식이 맛은 떨어지는 걸 알겠습니다. 김장만 해도 추울 때 버무려야 맛깔스럽게 됩니다. 하필이면 추운 날을 잡아 버무리는 이웃 어른의 말씀입니다.
 
젊어서야 그렇다 쳐도 연세가 드신 최근까지도 여전합니다. 김치 냉장고가 나오면서 아무 때고 담그는 것보다는 색다른 느낌이었죠. 무에 그리 차이가 나랴마는 저도 같은 견해입니다. 추울 때 버무려도 자칫 시는 경우가 많은데 따스한 날은 더욱 안 될 말이죠. 추운 날이라면 냉장고에 넣어도 탈이 될 건 없으니까요. 십 년 전만 해도 11월이면 추웠습니다. 메주를 쑤고 김장을 하면서 화초까지 들어놓았건만 푹한 날씨에 괜한 곤욕을 치렀습니다.
 
오촌 당숙이 계셨습니다. 얼마나 부지런한지 벼 타작을 하면서 일변 마늘을 심는 분입니다. 일찍 끝내 놓고는 추울 때 일하는 걸 나무라면서 당신의 부지런함을 드러내곤 했지만 마늘 농사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언젠가 한 해 겨울 보니 마늘을 밟고 계시더군요. 심고 따스해지는 바람에 왕겨가 들떠 올랐다고 하는데 마늘도 벌써 파랗게 싹이 돋았습니다.
 
몇 번을 밟아 줘도 그대로라서 볏짚까지 덮어 주었는데 그마저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을 들으니 윤곽이 잡히더군요. 아무리 봐도 부지런한 성격과 푸근한 날씨 때문이었습니다. 한번쯤은 들떠 오른다지만 추울 때 심었더라면 여파는 최대한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언제가 그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린 적이 있었으나, ‘농사는 내가 더 잘 알지’하시곤 그만입니다. 막연한 추론이었고 어른을 설득하기도 쉽지 않아 더는 우기지 못했지만 추워야 제격인 속성은 어렴풋이 감지했던 거지요. 마늘뿐 아니라 보리밟기도 있습니다. 열이 많아 추울 때가 적기라는데 그래서 꽝꽝 얼어도 괜찮다는데 단지 쉽게 끝내기 위한 거라면 심각해집니다. 오촌당숙처럼 일찍 심고 싶은 마음에 서두르는 것도 탈인데 추운 게 싫어서라면 더더욱 문제겠지요. 
 
추운 날 심어도 괜찮은 속성과 훨씬 더 좋을 수도 있는 내성은 그렇게 깊은 뜻이 있습니다. 바람 불고 진눈깨비가 날려도 그래야 탈이 없다면 역경 또한 극복할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제가 메주든 김장이든 추워도 그 때 시작해야 된다는 것을 숙지하게 된 배경이고 늘 강조해 온 것인데 뜻하지 않은 전철을 밟게 되었군요. 추울 때가 정석이라는 것을 알고도 저지른 실수라 더 유감이었던 거죠.
 
따스한 날 메주를 쑤면서 조약돌은 피했습니다. 하지만 그로써 된장 맛이 떨어지면 일 년 내 속 썩일 테니 수마석을 만났습니다. 더는 병폐가 없으려면 추워져야 할 텐데 또 비가 온다니 걱정입니다. 다 제하고 장만 맛있게 되면 그만인데 계속 찜찜하군요. 좀 편하게 지나가려고 했는데 마르기도 전에 그 짝이 났습니다. 새삼스러운 말로 추울 때가 아니면 곤란하겠다 싶어진 거죠.
 
인생 또한 태풍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지요. 특별히, 태풍이 오기 직전과 절정이 되는 태풍의 눈은 고요하잖습니까. 태풍이 요란한 것은 가장자리였고 만들어질 때 뿐이죠.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조용한데 주변만 맴돌았지요. 시련과 고통도 폭풍 속처럼 뛰어들기만 하면 더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추워서 곱은 손을 불어가며 쑨 메주는 별달리 병폐가 없는 것처럼 역경 또한 우리를 다치게는 못한다는 걸 깨우칩니다. 가랑비 뿌리는 계절의 말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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