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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늦가을 이삭을 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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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11.17 18:00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정희 시인. 둥그레동인회장
가랑비가 뿌렸다. 집 앞 공터의 단풍나무가 비를 맞은 채 꽃노을처럼 빛나고 있다. 얼마 후 비가 그치고 죄다 떨어졌으나 한나절 내 붉게 물들어 있던 모습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지난 주 단풍놀이를 갔었다. 끝물이라서 크게 기대는 하지 않고 떠났다. 가는 도중 비까지 내리는 바람에 단풍놀이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어찌어찌하다가 시기를 놓쳐버린 게 사뭇 아쉬웠는데 울멍줄멍 이어지는 단풍산맥은 볼수록 장관이었다. 단풍이 한창 좋을 때에 비교할 수는 없으나 뒤늦게 구경을 간 것 치고는 뜻밖의 수확이었다는 의미다.
 
단풍이라야 절반은 떨어진 상태였다. 낙엽송은 늦게까지 물들지만 참나무와 단풍나무는 거반 시든 채였다. 그나마 절정기 못지않게 화려했던 것은 줄기차게 내린 비 때문이다. 끝물에 접어들 때 흔히 나타나는, 빛 바랜 것 같은 희미한 빛깔이 촉촉 물기를 머금으면서 고유의 이미지가 드러났다. 차창 밖 단풍 군단은 거대한 빛의 스펙트럼이었을까. 꽃보다 고운 게 단풍이라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한 느낌이었다.
 
올해는 단풍이 예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단풍도 비가 적절히 내리면서 원만히 자라야 고운 법인데 유난히 가물었다. 그래 그런지 물드는 이파리마다 까칠해 보였는데 뒤늦게 가랑비가 뿌리면서 원초적인 색상이 되살아났다. 예년에도 가을비에 되살아났지만 올해 유독 산뜻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꽃은 단순히 곱다고 할 것이지만 단풍은 처연한 뉘앙스다. 봄의 꽃그림자는 해맑은 분위기였으되 물 내리는 가을 산의 땅그림자는 고즈넉했는데 가랑비가 내리면서 오히려 밝은 이미지다. 같은 빗줄기에 휩쓸리는 것인데 봄꽃은 물이 오르면서 피어 그런지 갈수록 희미하다. 물이 내리면서 물드는 단풍은 가을이 깊어질수록 산뜻하다가 웬만치 빠져 까칠해질 때 비가 오면서  조락의 계절이 무색할 정도로 아기자기해진다.
 
단풍이 좋을 때는 오늘처럼 비가 뿌리지 않아도 그답지 않다.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반들반들 윤택하게 자란 잎사귀는 물 내리는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으니까. 허나 올해처럼 강우량이 적을 때는 가을에 물이 내리면서 더더욱 까칠해지게 된다. 그런 터에 철적은 가랑비가 내리면 때맞춰 단풍을 물들이듯 선명한 빛깔이 훨씬 돋보이이고 그럴 때마다 가을의 마지막 옷자락을 놓쳐버린 것 같은 허전함을 달래곤 했었다.
 
녹음이 좋은 만큼 단풍은 곱게 물든다. 그래서 가을에 비가 내려 예쁘게 되는 덧칠의 효과는 필요치 않게 된다. 초록을 자랑하던 녹음이 가을에 그대로 물든다면야 단풍으로는 최고다. 허나 녹음은 별로였어도 늦가을 가랑비가 내리면서 슬라이드로 펼쳐지는 채색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비가 적어서 앙상했던 잎이 빛깔은 좀 곱지 못해도 때늦은 가랑비에 촉촉 아기자기해지는 것처럼. 물드는 단풍에도 이삭이 있었던 걸까. 
 
풍족하게 살던 사람은 말년도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녹음이 우거진 해의 단풍이 더 좋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뒤늦게 비를 맞아 깔이 드러나는 것처럼 말년의 단풍이 아름다울 수는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으면 다행이겠지만 훗날을 바라 꿋꿋하게 살 수도 있을 것이기에…
 
눈 감으면 울멍줄멍 봉우리마다 노랗게 혹은 빨갛게 물든 나무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온갖 빛깔로 늘어선 단풍 산맥이 산세와 언덕 혹은 기울기에 따라 편편 다르게 묻어나는 것도 수없이 이어진 능선만치나 미묘한 느낌이다. 예쁘지 않을 거라는 추측을 뒤엎은 아기자기 고운 단풍의 산맥처럼 지금은 혹 불완전해도 뒤늦게 내린 비로 산뜻해지는 삶도 나름대로 괜찮다.
 
딱히 단풍이 아닌 삶의 공식도 마찬가지다. 봄에 여름에 비가 적게 내리면 가을에 또 그만치 내리게 돼 있다. 가뭄으로 봄 작물에 지실이 들 때는 뒤늦게 뿌린 가을비에 이듬작물의 작황이 좋아진다. 봄에 부족했던 부분이 가을에 채워지듯 살다 보면 아쉽게 느껴지던 부분이 종종 채워지기도 한다. 내일을 바라보지 않으면 결코 주어질 수 없는 2차적 결실이라고나 할지.
 
문득 단풍나무 밑으로 떨어진 잎이 수북하다. 이제 가랑비가 한 번 더 내리면 빗줄기에 죄다 수장될 테지. 울멍줄멍 봉우리마다 노랗게 혹은 빨갛게 물들어 있던 수많은 나무 역시 이파리 하나 없는 나목으로 겨울을 날 것이고 그게 삶이다. 아름다운 단풍 군단에 환호하다가 일제히 떨어지는 가랑잎을 아쉬워하지만 봄에 또 다시 푸르러지는 순환 과정 역시 소망이었으니까. 그래서 한 그루 나무도 저리 바뀌면서 우리에게 엄숙한 섭리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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