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안개가 앞을 가로 막을 정도인 지난 가을 어느 날 새벽, 카메라를 들고 대청호에 갑니다. 호수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의 멋진 형상은 잠시 머물다가 날아가고 다시 왔다가 사라집니다. 햇빛이 물안개를 밀어내는 대신 푸른 호수는 예쁜 물결을 만들어 나에게로 다가옵니다. 셔터는 신이 나도록 노래를 부르고 숨고르기를 하는 동안, 나는 돌로 쌓아 만든 길고 긴 호수가의 둑길을 걸어봅니다. 둑길 바닥 양 옆에는 연노란 색깔을 내며 말라가는 강아지 풀꽃으로 덮혀 있습니다. 몇 년 되지도 않은 메마른 둑길에서 이다지도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이나 하듯이. 실 같이 가는 꽃대와 애기 손가락 같은 토실토실한 조그마한 이삭들이 호수의 물결소리에 맞추어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습니다. 강아지 풀꽃들이 너무나 여리고 애처로워 살며시 감싸주고 싶은 마음에 가던 길을 멈추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살짝 만져 봅니다. 언뜻 나태조 시인의 ‘풀꽃’이 생각납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라는 시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심’이란 것 아닐까요.
강아지풀의 이삭 털에는 탄력 있는 까끄라기가 길게 나와 있는데,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닥을 탁치면서 강아지 부르는 소리를 내면 마치 그 소리를 듣고 따라 오듯이 이삭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강아지처럼 부르는 대로 따라가는 모습에서 붙여진 이름이 ‘강아지풀’ 또는 ‘개꼬리 풀’ 입니다. 강아지풀은 일년생 식물로 볏과에 속한 풀로 씨로 번식하며 어디서나 잘 자라 세계 어디에 가도 볼 수 있습니다. 털빛이 노란 금 강아지풀, 털빛이 연붉은 자주강아지풀등 수많은 종류가 자생하고 있습니다. 꽃은 한여름에 피고 가을에 뿌리를 캐어 먹으면, 사람 몸속의 기생충을 없앤다는 민간요법도 전해집니다.
고사에 의하면 옛날 로마에 유명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의사는 이발사까지 겸했으므로 왕을 비롯하여 서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 의사를 존경하지만, 태자는 자기를 평민과 다름없이 취급하는 이발사에게 불만을 품고, 금으로 만든 가위를 의사에게 주며 그것으로 머리를 깎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금은 철보다 무르므로 금가위로는 잘 깎아지지 않자 태자는 의사가 충성심이 없다 하여 추방하겠다고 합니다. 의사는 스스로 가위로 목을 찔러 자살합니다. 의사의 친구이기도한 왕이 이 소식을 듣고 태자에게 당장 잘못을 뉘우치도록 합니다. 태자도 그때야 자기 잘못을 알고 의사에게 달려갔으나, 이미 죽어 묻힌 무덤에는 풀 한포기가 돋아나 바람에 나부끼는데, 그 모습이 긴 목을 빼고 노여워하며 애처롭게 몸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바로 그 풀이 강아지풀로 꽃말은 ‘노여움’이라고 한답니다.
서인원(전 한국해양연구원 운영관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