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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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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9.15 17:40
  • 기자명 By. 충청신문

글/ 남균우

 

3부. 이괄의 난

 

이무렵 광해군은 이귀의 역적모의에 대한 고변이 연달아 올라왔으나 옥사가 지긋지긋했는지 병이 있어서 만사가 지긋지긋했는지 적극적으로 대하지를 않았다. 이홍립의 가담 사실도 포착되어 박승종이 그를 잡으려 했으나 그 두 사람은 사돈 사이여서 머뭇거렸고 거사가 있기 전날 반군에 가담한 훈련대장 이홍립에게 궁성을 호위하도록 일부군사를 보내 창의문 밖을 수색하라고 했으나 한밤중이라고 핑계대고 나가지 않았다.

1623년 3월 12일 홍제원 장만의 집에 모인 군사는 200여 명에 지나지 않았고 총대장 김류도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장단에서 오기로 된 군사도 오지 않았고 김류는 고변의 소식을 듣고 체포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급하게 된 반란군측은 이괄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심기원이 군사 200여 명을 거느리고 합세했고 이서가 700명을 끌고 올라와 거사에 가담한 군사는 1,400명 가량이었다. 날이 밝은 새벽에 이들은 돈화문을 도끼로 부수고 입성하여 영문도 모르고 궁내를 살피던 선전관과 문지기를 죽이고 준비해 놓았던 장작더미에 불을 질렀다. 성공적으로 궁궐에 들어 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홍립은 시위병의 무장을 해제하고 다른 궁궐 호위병은 도망치고 다 흩어졌다. 그런데 광해군을 쫓아내는 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사대의 예의를 버렸다는 것이 첫째의 이유였다. 인륜을 버린 것보다 더 그릇된 것으로 판단했다.

광해군 즉위 15년(1623) 3월, 대북파에게 탄압을 받아 몰락하게 된 서인(西人)의 일파 가운데,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김류·이괄(李适) 등은 광해군이 형과 아우를 죽이고 어머니(계모) 인목대비를 5년 동안이나 감금한 행위를 패륜아적 만행으로 지탄하고, 무력 정변을 일으켜 폭군을 폐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비밀리에 서울 인근 고을의 수령을 설득하여 거사에 가담시키는 한편,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을 왕위에 옹립하기로 모의하였다.

3월 12일, 이귀·이괄·김자점 등은 반정군(反正軍) 대장에 김류를 추대하고, 그날 밤 각자 모집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다. 이괄은 심복 군관 20여명을 동원하였으며, 이귀·한교(韓嶠)·송영중(宋英重)은 2, 3백 명의 보병을, 그리고 심기원(沈器遠) 역시 2백여 명의 무사를 동원하여 이끌고 집결지에 나타났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장단으로부터 이서(李曙)의 부대가, 이천(李川)으로부터 이중로(李重老)의 부대가 당도하였다. 이들은 능양군 이종을 호위하면서 도성 창의문(彰義門=紫霞門)으로 돌입하였다.

광해군 역시 밀고자의 제보를 받아 이 사실을 알고 포수 수백 명을 배치하였으나, 반정군에게 포섭된 훈련대장 이홍립(李弘立)이 내응함으로써 방어전은 실패하고 말았으며, 창덕궁 대궐이 반정군에게 점령되기에 이르렀다.

다음날(3월 13일), 광해군은 폐위당하여 강화로 추방, 유폐되었으며, 정인홍·이이첨·유희분36) 등 간악한 신하들도 모조리 극형에 처하여졌다. 그리고 능양군 이종은 반정군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제 16대 임금 인조(仁祖)이며, 즉위 당시 나이는 28세였다.

인조(仁祖)는 즉위한 후, 반정공신 54명을 포상하였다.

반정군의 주장 김류를 비롯한 김자점·이귀·심기원·이홍립 등은 1등 공신으로 기록되었으며, 이괄·박효립·심기성(沈器成)·이수(李邃) 등은 2등 공신에 올랐다. 그리고 김류는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이귀는 호위대장(扈衛大將)·신경진은 그 부장(副將)으로, 김자점·심기원 등은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어 광해군 당시 문란해진 조정을 숙청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2등공신 철성부원군에 책봉된 이괄은 성종(成宗 9代) 때의 명신 병조판서 대사헌 이육(李陸)의 후손으로 반정이 일어나기 전에는 함길도 북병사에 부임하게 된 장수였다.

이괄은 무과에 급제한 후 형조좌랑, 태안군수 등을 역임하면서 당대에 촉망받는 장재로 인정받았으며, 무신으로서 그의 용맹과 지략은 문약에만 흐르는 사회에서 크게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나 큰 장수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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