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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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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9.14 19:11
  • 기자명 By. 충청신문
글/ 남균우
 
3부. 이괄의 난 
 
새 임금이 된 이혼은 바로 조선조 제15대 광해군(光海君)이다. 
 
34세의 장년으로 즉위한 광해군은 신하들의 당파 싸움에 국력이 약해져서 참혹한 전란(임진왜란)을 겪게 되었음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당쟁부터 폐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재위 15년 동안 전화(戰禍)로 황폐화된 나라를 복구하는 데 온갖 힘을 기울였으며, 성지(城池)와 병기를 수리하고 호패법(號牌法)을 정리하여 병력을 확보함으로써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북방의 신흥 강국인 후금(後金, 女眞 滿洲部族)과 명(明) 제국간의 공방전에서 중립을 지키며 능숙한 외교술로 조선의 난처한 입장을 원만히 처리하는 등, 대내·대외적으로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 
 
그러나 당초 목표하였던 당파싸움의 불식은 실패로 돌아가고, 대북파(大北派)의 우두머리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허균(許筠) 등 신하들의 농간에 휘말려,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자신의 형인 임해군 이진과 14세의 어린 이복아우 영창대군 이의를 역모죄로 몰아 죽이는 등 패륜 행위를 저질렀다. 
 
이렇게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됨에 따라, 정치도 문란해졌다. 
 
왜란 당시 의병장 출신이었던 정인홍은 자신의 최대 정적 유영경(柳永慶)을 모함하여 죽이고 영의정에 오른 후, 광해군을 심리적으로 교묘히 조종하여 항상 의심증과 공포증을 품게 만들었으며, 이이첨은 중국 진시황 때의 간신 조고(趙高)에 비유할 만큼 잔혹스런 인물이었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저자 허균도 대북파의 일당으로서 광해군의 폭정을 조장하였으며,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과 채겸길(蔡謙吉)·장의범(張懿範) 역시 난신(亂臣)으로서 권력과 세도를 누리며 나라를 혼탁시킨 자들이었다.
 
인목대비의 유폐논의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이귀는 평산 부사로 나가 있었다. 그는 선배이자 서인계열인 이항복이 폐모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유배되는 모습을 보고 분개했다. 
 
한편 이항복은 서울을 떠나면서 김류를 불러 “종묘사직을 편안케할 사람은 그대뿐이다.”라는 여운을 주어 뒷날을 부탁했다.
이귀와 김류는 절친한 사이였으나 이귀는 덜렁대는 성격이고 김류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이 무렵 장단과 평산 사이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을 잡아먹어 파발의 길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귀가 평산부사로 부임할 때 호랑이를 잡아 사람들이 편안히 다니도록 하라 하고 부탁을 했다.
 
평산에 부임한 이귀는 군사를 동원하여 여러 마리의 호랑이를 잡아 임금에게 바치면서 효과적인 방법을 건의했다. 
 
“호랑이를 잡는 곳이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인데 호랑이가 다른 도로 도망가면 규정에 월경을 하는 것이어서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잡으면서도 늘 중간에 돌아오게 됩니다. 청컨대, 호랑이를 쫓을 때에는 경계에 억매이지 않도록 해주소서.” 
광해군은 이를 허락하고 장단과 개성에서도 평산과 같이하여 호랑이를 잡으라고 지시했다.
 
이귀는 합법적으로 군사를 모아 장단 등지에 출동하면서 서울을 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서울의 심기원을 평산으로 불러 모의를 거듭했다. 서울에서는 그의 아들 이시백이 최명길, 김자점과 내통해 거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은밀하게 움직여 신경진, 이정구, 장유 등을 끌어 들였다. 이들은 서인으로 폐모론을 반대했고 이항복을 따르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부하가 이귀가 반역을 도모한다고 조정에 알렸다. 이귀가 잡혀와 문초를 받았지만 실권파인 박승종과 유희분은 이이첨이 옥사를 또 일으키는 것이 두려워 이귀의 벼슬을 떼는 정도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귀는 안협에 있는 농장을 아지트로 삼아서 궁궐 호위책임을 맡고 있는 훈련대장 이홍립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귀는 이홍립과 한 마을에 살았으며 장유의 동생 장신은 그의 사위였다. 이귀와 장유의 끈질긴 설득으로 넘어간 것이다. 무관 이괄과 장만도 합류하기를 결정했다. 이들 무리들은 김류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홍제원 장만의 집에 군대를 집합시키기로 밀약했다. 새 임금으로는 선조의 손자이고 광해군에게는 조카가 되는 능양군을 추대하기로 하고 그의 동의도 받아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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