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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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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9.13 19:17
  • 기자명 By. 충청신문

/ 남균우

 

3. 이괄의  

 

건주위 누루하치는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능란한 전술로 세력을 키워 나갔다. 조선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명나라는 조선에 군대를(사령관 이여송) 파견했고 그런 틈을 타서 주변의 여진족을 복속시켜 왕조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세력이 커진 누루하치는 임진왜란(조일전쟁) 일어나던 9월에는 2 명의 구원병을 조선에 보내겠다고 했으며 조선에서는 의논할 가치도 없다고 일거에 거절했다. 이것은 누루하치의 전술로써 조선과 명나라에 호의를 보이면서 부족통일에 역량을 쏟아 붓기 위해서였다. 누르하치는 회유의 방법을 써서 투항하는 자는 직책을 주어 이용하고 반항하는 세력은 무력을 써서 복속시켰다. 명나라에는 순종의 뜻을 보이며 조공하는 일도 열심히 하니 명나라는 속아서 오히려 변방을 막아주는 울타리로 여기고 누루하치에게 용호장군의 직함을 내렸다. 언제 튀어 나올지 모르는 호랑이를 키운 꼴이었다

누루하치는 백두산 동북방에 정복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듭하였으며 수만 명의 포로를 거두는 동시에 만주 땅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여진의 건주위는 완전한 독립국가로 우뚝 서서 명나라와 대등관계임을 천명했다.

이렇게 되니 천자의 나라로서 주변의 국제질서를 총괄한다고 여기는 명나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조선도 자기 일처럼 분개했으나 무력으로는 어찌해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후금을 군신의 명분을 저버린 원수로 여겼다.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전후 명나라에 대해 재조(再造) 은혜 의식으로 얼을 빼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망해 명나라가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겨 다시 구해 주었다는 것이다. 명나라에 대한 재조의 은혜의식은 사대에서 진전된 새로운 이데올로기였다

현실정책에도 직접 연결시켜 후금을 오랑캐 나라로 규정하고 임금으로 받드는 나라인 명나라를 위해 신명을 바치는 것이 변할 없는 인간의 도리라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존명배청(尊明排淸) 명분론과 군신론이 등장했다.

광해군과 일부 대북파는 이들과 마찰을 겪으면서 독자적인 외교를 펼치려고 노력했다.

명나라는 후금이 조공을 중지하고 국경을 압박하자 정벌을 단행하기로 하였으나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으니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라고 요청했다. 요청에 즉각 호응해야 한다는 세력이 우세 했으나 광해군은 남쪽에 변란이 있어 군사를 보낼 없다. 훈련이 안되어 쓸모가 없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했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요청이 완강하고 친명파의 세력에 밀려 없이 조선에서는 파병을 해야 했고 그래서 강홍립에 13000명의 군사를 주어 파병했으나 강홍립에 밀지를 내려 판세가 명나라에 불리하고 후금이 강하면 눈치를 보아서 후금에게 항복을 하라고 일렀다. 이렇게 외치에는 요령껏 대처했으나 내정에서는 여러가지 실정을 하여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실각을 하게 되었다.

1622(47

안주골에서 선정의 공이 지대함을 인정받아 자헌대부(2 판서 ) 특진됐다.

1623(48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니 광해조에 중용되었던 사람들에게 죄목을 만들어 치죄하고 있었다

평소에 남이흥을 시샘하는 자들이 중상모략을 하여 화를 면하기 어려웠고 장차의 일도 예측하기 어려웠으나 도원수 장만이 남이흥의 인품과 능력을 익히 알고 변호하여 화를 면할 있었다

도원수 장만은 오히려 왕에게 청하여 남이흥을 중군(中軍)으로 삼아 군무를 맡아 총괄케 하였다. 이때는 장만이 도원수였으나 몸이 불편하여 군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신임하는 남이흥에게 위임 총괄케 하였다

이때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남이흥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정사를 처리하여 명성이 높았고 어려움과 번거로움을 다스려서 사람마다 입을 모아 남이흥을 천거함에, 능한 자로 세상에 알려지니라는 기록이 있다.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남이흥에 대한 당시의 평판과 위치를 있다.

1624(49)

임진왜란 7 전쟁을 겪은 선조는 이몽학의 반란(유사록의 기록) 평정된지 11 , 왕세자 이혼(李琿)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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