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남균우
2부. 성장
남이흥은 위대한 이항복과 3야의 위대한 인물을 알고 존경하였고, 당시 세도가인 이이첨과 정인홍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정당당한 처신을 하였다.
■1619년(44세)
당시의 조선왕조 실록을 그대로 소개하겠다. 구성부사에 적합한 사람을 신들이 의논하여 천거하였습니다. 구성이 비록 성을 지키는 지역은 아니나 연령령이 창성과 삭주의 사이에 있으니 마땅히 막아서 끊어야 합니다. 장만이 올린 방약에 구성부사를 장수로 삼아 파수하게 애햐 한다고 한 것은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임이흥이 방어사로 본토에 내려 갔으니 또한 하나의 군사없는 장수이니 이 사람을제수하고 겸하여 방어사로 차임한다면 본부에 있어서는 사람을 얻은 셈이 되고 파수하는데 있어서도 믿을 만합니다. 이시발의 뜻도 그러하기에 감히 아룁니다.
-아뢴 대로 하라 답하였다. 이렇게 해서 구성부사로 재임하게 됐고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현재 무장중에 뚜렷이 들어나 일컫어지는 사람은 모두 임무를 받았으나 전통제사정기룡과 전병사 남이흥은 아직 받은바 임무가 없습니다. 즉시 올라오게 하여 장만에게 보내어 재능에 따라 임무를 맡기게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러한 뜻을 말하여 체찰부사 장만에게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기에 아룁니다
남이흥도 재력이 뛰어난 사람인가 이러한 사람들을 서도로 모두 보내버린다면 도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할 때 변방ㅇ만 약탈하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도성에 놔 두었다가 형세를 보아가며 임용해야 할 것이다. 다시 상의하여 처리하라.
광해 11(을해년) 구성부사 겸 장수방어사에 제수되다.
본시 구성 땅은 토질이 척박하고 백성이 적었으며 산적들이 들끓는 지역이어서 도적들이 관고(官庫)를 털어가는 일이 자주 있는 그런 험한 곳이었다. 그러나 남이흥이 도임하여 월 여만에 모든 정사를 갖추고 고을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해서 1620년 3월에 송덕비가 세워졌는데 비문에는 “미만일삭 은중백년(未瞞一朔 恩重百年)”이라고 쓰여 있다. 그 뜻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 그 은혜는 백년보다 무겁다는 뜻이니 남이흥의 치적이 단시일 내에 뚜렷하게 성취되었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1620년(45세) 광해 12년 안주 목사겸 방어사에 임명되다.
이때는 명나라의 힘이 약해져서 요동과 광동에 난이 일어나 두 곳이 다 함몰이 되었다. 그래서 수천 명의 중국인들이 청천강의 북쪽인 안주 땅으로 피난하여 살았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과 섞여 장사하면서 살았는데 남이흥은 이들을 차별 없이 공정하게 법으로 다스리고 은혜로써 보호하여 사사로움 없이 대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남이흥을 지극히 고맙게 생각하고 받들었으며 그러면서도 두렵게 여기었다.
남이흥의 위엄과 믿음이 중국인들에게도 감동을 주었을 만큼 비범함을 보여주는 예인 것이다. 이때 남이흥은 이미 관서지방의 정세가 혼란스러워 변란을 염려했고 이것을 대비하여 군비를 정돈하고 성을 수축했으니 유비무환의 정신이 발휘된 것이다.
남이흥이 정묘호란을 당하여 안주성에서 싸우다가 승산이 없자 중영루에 불을 질렀다. 이때 남이흥과 같이 산화한 중영루도 그가 기공한 것이다. 이것 역시 그의 유비무환의 정신을 증명한다. 이때 중국 사신이 안주에 와서 보니 안주목사 남이흥이 범백제구를 갖추고 어질게 다스리니 크게 감복하여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남이흥은 재주와 인망이 있어 조정에 선 지 26년 동안에 주군(고을의 군수?시장)을 7번, 곤얼(대장)을 3번 하였으되 집 한 칸 영위한 일이 없고 손바닥만 한 땅을 산 일이 없었다. 파직이 되면 세를 내어 살고 먹는 것이 곤궁하여서 빌어서 이어도 편안하였으며, 오직 정도만 걸어왔다.
주군, 곤얼 10번에 칭송하는 노래 또는 송덕비가 7번이나 세워졌다니 어떻게 관민을 다스렸는가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선정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남이흥의 부인 정씨가 서울에서 살았는데 공신의 몫이라고 집을 받았다. 그런데 팔아서 성의 서쪽 한 모퉁이에 집을 마련했으나 남이흥은 문에 들어선 일이 한 번도 없이 안주성 싸움에서 세상을 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