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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쓰는 역사]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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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9.08 16:02
  • 기자명 By. 충청신문
글/ 남균우
 
2부. 성장 
 
이때 주민들은 공의 떠나는 길에 상의(백의)를 벗어서 밟고 가도록 최대의 경의를 표하였는데 그 길이가 10리에 달했다고 한다.
 
■1617년(42세 광해 9년) 
 
경상우도 병사 겸 진주 목사를 제수 받고 근무하다가  1619년에 임기를 채우고 돌아옴.
 
진주성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됐다. 남이흥의 재임 기간이 아주 짧은 2년인데 그의 임기에 진주성을 복원했다.
 
촉석루(矗石樓)를 1918년에 복원했다.(축하하는 시문이 지금까지 많이 전해 내려옴)
 
촉석루21)는 고려 고종 때 목사 김지대(金之垈)가 창건했다고 하나 분명치 않으며, 촉석루는 충숙왕 8년(1321년)에 목사 안진이 중수하였고, 우왕 5년(1379년)에 왜구가 불태운 것을 목사 김중광이 새로 세우니 3번째 중수이고,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이조 광해군 10년(1618년)에 병사 남이흥이 7번째로 중수한 것이다. 또 영남포정사(望美樓 : 문화재자료 3호) 역시 광해군 10년(1618년)에 병사 남이흥이 경상 우병영의 동문(東門)으로 지은 것으로 병사가 목사를 경직하였기 때문에 영남 포정사라 하였고 뒷날 경상남도의 관찰사 영이 이곳에 자리하면서 감영의 정문이 되었다. 
 
그때 간판을 영남포정사라고 붙였기 때문에 지금도 영남포정사라 통한다. 망미루의 현판 글씨는 수원유수 지중추부사를 지낸 서영보(徐榮輔)가 썼다.
 
그리고 남이흥은 북쪽 비봉산에 있는 의곡사(義谷寺) 북장대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년(1618년) 주지 성간 선사를 도와 다시 복원토록 하였다. 이 절은 신라 문무왕 5년(665년)2월에 혜통조사가 창건했고 월명사(月明寺) 또는 의곡사(義谷寺)라 불려왔다. 
 
조선 초기에 와서 의곡사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서 고려 말기부터 의곡사라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보아 병사 남이흥의 치적과 추진력을 알 수 있으며 의곡의 단풍은 진주8경의 하나이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 광해군 11년(1619)에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호)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 침입한 왜적을 상대하여 싸운 결과(임진란 3대첩의 하나)승전을 이루고 전사한 김시민 장군의 공적비다. (주민들이 추모함을 알지 못하여 서로 더불어 눈물을 떨어뜨리고 돌을 세워 공적을 길이 알게 하고자 하더니 때마침 상국이 여기에 관으로 와서 이에 고로에게 이르기를(김목사가 성을 보전한 공은 우리나라에 변란이 있은 이래 아직 있지 못했던 일이니 인멸되어 전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은 불가하니 금석에 새기어 여구토록 도모해야 한다)말하고 백성들에게 기록하기를 명하였다. 이에 백성이 삼가 돈수하고 나아와서 이르기를 아아 우리후의 충과 용은 비록 고인에게서 구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때 남이흥은 북청에 유배 중인 오성 이항복을 사모하고 따랐으니 1618년 4월 13일 천리길에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남쪽의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정충신의 북천록에 있는 말)
 
진양지(현 진주 晉州)에 보면 명관 남이흥은 정사를 맑고 엄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곳에서도 바른 정사를 실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이흥이 진주목사 겸 경상우 병사로 재임할 때는 당대 제일의 세도가 정인흥(영남을 대표하는 선비로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서 많은 공을 세워 추앙을 받았으나 벼슬길에 올라 이이첨과 함께 권력을 잡은 후 권력을 함부로 휘둘러 정계를 주름잡다가 인조반정으로 실각됨)의 집이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한 번도 찾은 일이 없었고, 고을을 순력할 때 우연히 그의 집 문 밖에 있는 절에 투숙하게 되자 정인흥이 손자를 보내 만나기를 청했어도 병을 칭탈하고 거절하였다하니, 남이흥의 불굴의 기개가 확연함을 알 수 있다.
 
또 그때 이원익(李元翼), 신흠(申欽) 등 양 정승과 한준겸(인조의 장인)이 다 광해에 죄를 지은 처지가 되어 시골에 있었는데 세력을 쫓는 자는 문전을 오고감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등 움츠리고 딴전을 피웠다. 그러나 남이흥은 평소에 그들을 존경하던 차에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람을 시켜 문안하였다. 사람들이 묻기를 잘나가는 이이첨은 박대하면서 아는 바 없는 3야(이원익, 신흠, 한준겸)에게는 후하게 대하는데 만약 이이첨이 이를 알면 화가 어찌 가벼울 것인가 염려하면서 무슨 까닭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남이흥은 웃기만 했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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